생각이 바퀴고 말이 수레
말 농사를 퍽 오래 지었지만 아직도 시큼텁텁하여 남 먹이기에 모자란 말들만 수확하는 건, 아무래도 말의 당도는 사람의 온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고작 이 작은 이치 하나를 깨닫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니. 그러면서 갈아엎은 글이 얼마며 파묻어 버린 말은 또 얼마야.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바라본 그림과 그려본 그림만큼 달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단숨에 알 수 있는 세상을 살면서도 오랜 시간을 들여 이미 아는 작고 쉬운 것들을 다시 깨닫는 비경제적인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겠지. 그렇게 죽을 때까지 읽어도 남들 다 알고 심지어 나도 아는 것들의 극히 일부분만 깨닫는 데에 그치듯, 역시 죽는 날까지 쟁기를 끌고 호미를 휘둘러도 나는 내가 원하는 당도의 말을 거두어들이지는 못하겠어도, 물론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는 걸 깨닫는 것은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서, 쟁기를 차게 내던지던 날이 있었듯 호미를 꺾고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날이 또 있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밭 위에 서서 그 부끄러움, 그 땀, 세상에 뿌려진 수많은 말들의 그 복잡미묘한 맛, 그런 것들 덕분에 조금은 더 적합한 온도가 된 내 자신을 알아채거나 혹은 모른 채로, 거친 풀들을 베어내고 땅을 뒤집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를 다시 해보자, 처절하지만 철저하게, 나는 늘 시작을 사랑하니까, 시작을 잘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일구는 사람의 지나간 모든 처음들이 쌓여 반복된 처음을 처음 만나는 처음으로 만들어 주는-이 또한 작은 하나의-이치를 믿고서, 내가 잘 하는 것들을 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잘하는 것들을 잘 하는 것으로, 고작 나만큼의 달콤한 말을 만들기 위해 나의 온도를 조금 더 올리는 것으로, 말을, 말을 하자.
--- 읽은 ---
78.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8
문장 문장을 환하게 빚어내는 기예만 가지고는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문장과 문장들, 문장의 덩어리인 문단과 문단들의 밀도와 배치를 글의 목적에 조응시켜 읽는 이들이 저마다 해석의 별자리를 짚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 그런 힘이 없다면 좋은 문장가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작가가 되기는 어렵다. syo가 작가가 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무리 써도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가 없다. 이미 뼈저리게 알았으므로 다시 새롭게 뼈저릴 필요는 없는데, 세상에 좋은 글이 너무나 많아서 책 읽는 syo의 뼈는 365일 저리다.
하던 대로 발췌는 하는데, 한 꼭지 글 속의 모든 문단이 하나의 이야기를 향한 버릴 수 없는 포석이다 보니, 이렇게 한 문단 떼오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꼭지를 통째로 따 먹어야 한다.
장르를 막론하고 편안한 소설을 묘사하는 단어는 '가독성'이다. 희한하게도 가독성은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접근이 쉽고 아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술술 읽히는 책은 우리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소설들과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이런 픽션들로 충족되는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기존의 세계관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 자기와 똑같은 차를 모는 등장인물의 삶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 1990년대에는 루콜라를 먹다가 몇 년 후부터는 케일과 퀴노아를 먹는 사람들의 욕구 말이다. 그런 디테일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쁠 것이 전혀 없다. 디테일은 시간과 장소와 계급 속에서 서사를 갈아낸다. 하지만 이미 뻣뻣하게 경직되어 수상쩍은 진실로 변해버린 문화적 클리셰를 비추는 거울 역할 말고는 독자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하는 픽션의 도구가 되어버리면, 그때는 시시콜콜한 묘사 역시 바싹 메말라 무의미해지고 만다.
_ 시리 허스트베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79.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6
두 번째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 그때는 그저 호오, 재밌군- 하는 감각만 있었지, 이주윤 선생님에 대한 지금과 같은 불타는 애정이 없던 시절이었다. 2018년 4월이었으니 벌써 삼 년이 지났다. 재미있게도, 당시 syo는 이 책에 대해 이런 짧은 평을 남겼다.
“낄낄 웃다가 끝났다. 확실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맞춤법 책. 저자의 필력이 예사롭지가 않다. 다른 작품들, 이를 테면 에세이 같은 거, 기대해 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에세이 같은 거’를 읽고 사랑에 푹 빠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데는 거기가 아니고, 맞춤법 책을 읽고 쓴 평에다 당당하게도 ‘이를테면’을 ‘이를 테면’이라고 적어놨다는 것, 그 지점이 웃음 포인트다. 그 부분을 빼면, 나머지 감상은 세월의 공격을 잘 회피한 것 같다.
심지어 내가 三에게 이 책을 추천해줬던 모양인데, 당시 三은 자신이 글고자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글쓰기에 도전했다가 즉시 포기하는 패턴을 계절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syo는 알라딘에 글을 쓰라는 처방을 내려주었고, 가끔이지만 三은 그 말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三의 서재에 가면 일 년 한 개꼴로 리뷰가 있는데, 2018년 알라딘 서재를 완전히 떠난 三이 마지막으로 남긴 짧은 리뷰가 또 이 책이다. 재미있는 인생. 물론 三의 글은 다시 봐도 형편없기가 세상에 짝이 없는 경지다. 2018이나 2021이나, 안 될 놈은 안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인생.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는 1.24명에 그친다고 합니다 이 말인즉슨, 대한민국 여자는 평생을 살면서 아이 한 명을 낳을까 말까 한다는 얘기이지요. 상황이 이러한데 여자에게 경우도 없이 낳았느냐 묻는 것은 굉장히 실례가 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병과 관련된 경우에는 낫다를, 출산과 관련된 경우에는 낳다를 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정 헷갈리신다면 그냥 낫다라고 쓰시기를 조심스레 권해 봅니다. 여러분과 만나고 있는 여자가 무언가를 낳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할 것이며, 여러분이 무언가를 낳을 일도 없을 테니 어지간하면 상황에 맞을 겁니다.
_ 이주윤,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80. 한국 칸트철학 소사전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5
요건 뭐랄까, 팜플렛 느낌이라서 소소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백종현 선생님은 요거 말고도 비슷한 컨셉의 <칸트 이성철학 9서5제>라는 책을 내셨고, 또 이 책의 거대화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칸트사전>이라는 책도 내셨다. 그건 1100쪽이 넘는 대작이다. 즉, 이 책보다 읽음직한 책들이 많다는 이야기.
인간은, 요컨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상상력과 지성이 합치할 때 생명감을 느끼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의 ‘이성 비판’은 이로써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 도덕적 완전성, 아름다운 세계,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_ 백종현, 『한국 칸트철학 소사전』
81. 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지음 /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
최근에 워튼의 『징구』를 읽었는데, 친구는 그렇다면 꼭 읽어보라며『이선 프롬』을 권했다. 밀리에 있어서 일단 책장에 담아두고는, 언제나 그렇듯 다른 책들을 읽느라 혼 빠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조 퀴넌의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에서 이디스 워튼을, 특히 『이선 프롬』을 상찬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syo의 독서월드에는 단기간에 두 명의 작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은 독서 목록의 최상단에 즉시 진입시키는 훌륭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의 작동은 늘 성공을 낳았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당연히 성공이었다. 헨리 제임스의 싸다구를 날리는 이디스 워튼의 심리 묘사 실력은 든든했고, 그 심리가 사랑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징구』보다 이 책이 더 좋았다. 아, 저 불쌍한 애들은 결국 뽀뽀 한두 번 해보고 저렇게…….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지난 세기쯤 완전히 멸종하는 바람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말은 웃자고 하는 말이 되었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거라는 말도 있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놓고 사람만 변할 수가 없고, 사람을 놓고 사랑만 변할 수도 없다. 사랑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사랑도 변하지만, 그건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보다는 진행하는 전자기파에서 발생하는 전기장과 자기장 변동관계와 더 유사하다. 쉽게 말하면 닭이냐 달걀이냐의 관계긴 한데, 그 닭이 1초에 1달걀을 낳고 그 달걀이 1초에 1닭으로 태어나는 속도랄까. 헛소리 같긴 해도, 그러니까 사람과 사랑은 거의 동시에 변하고 변함 당하는 관계라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그럼 제가 오해한 거네요. 이제 그런 생각 안 할게요.”
“그래, 깨끗이 잊어버려, 맷!”
매티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가 갑자기 열기를 띠는 걸 눈치채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갑작스런 홍조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에 서서히 퍼져가는 어떤 생각을 내비치듯, 느리고 섬세하고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는 일감을 손에 걸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선은 뭔가 뜨거운 것이 둘 사이에 놓인 그 좁은 헝겊을 타고 전해오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 끝을 만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 그녀도 그의 손짓을 보며 이쪽에서 마주 흘러가는 열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헝겊의 저쪽 끝에 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_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
--- 읽는 ---
아무튼, 인기가요 / 서효인
인기 없는 에세이 /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슬픔 / 문성원
HOW to READ 라캉 / 슬라보예 지젝
공부의 철학 / 지바 마사야
나의 외국어 학습기 / 김태완
대멸종 / 시아란 외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 / 앤드루 맥아피, 에릭 브린욜프슨
폴리나 / 바스티앙 비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