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두드려 볼 가능과 권능 사이의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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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서평을 쓰는 일은 애당초 포기하였으나, 요즘은 짧은 평이나 단순한 추천조차도 포기해야 하는지 심도 있는 고민에 빠져 있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는 syo에겐 거의 ‘올해의 소설’에 육박할 만큼 감명 깊었기에 어딘가에 추천하였는데, 별 세 개를 받고 장렬히 망하였다. 김불꽃의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려다 syo의 서재에 들어 온 어느 이웃님은, 그 책이 들어있는 페이퍼를 읽고 하하호호 웃으셨다지만 책에 막상 그 책에 대한 정보는 0.1도 못 얻고 발길을 돌리셨다.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셨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은 정말 좋은 책인데, 좋은 책이긴 좋은 책인데, 내 올챙잇적 그 책 읽으며 올챙올챙 울었던 생각을 못하고 부주의하게 좋다좋다 써놨다가 순진한 어느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대체 내 추천 센스는 어떻게 되어먹은 것이지?
과연 LG트윈스 팬답게, 타율이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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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비단 거기만이 아니다.
어제는 소소한 개인적 슬픔을 토로하는 페이퍼를 썼는데, 그게 의외로 빵 터졌다. 댓글을 분석한 결과 핫스팟은 아마도 <무르피평생아프디푸스>라는 요상망측한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저게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리라고는 1도 예측하지 못했다. 유치해서 뺄지 말지를 잠깐 고민했다가, 고민학가 귀찮아서 그냥 뒀을 뿐인데, 걔가 효자일 줄이야. 대체 내 개그 센스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지?
과연 LG 트윈스 팬답게, 방어율도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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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의 한 가지 양상을 절제라고 불렀습니다. 절제란 모든 종류의 쾌락에 빠지려는 유혹을, 혹은 부와 유한정의 좋음을 우리에게 좋은 정도 이상으로 추구하려는 유혹을, 습관적으로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체적 쾌락의 유혹을 받는 한 가지 이유는 대개 우리가 그것을 즉시로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제할 줄 알게 되면 우리는 장기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좋은 것을 위해 단기적인 면에서 외견상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의 또 다른 양상을 용기라고 불렀습니다. 쾌락의 탐닉으로 방해받게 될 더 중요한 좋음의 획득을 위해 그 쾌락의 유혹을 이겨내는 습관적 기질이 절제라면, 용기는 우리가 좋은 삶을 위해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을 행할 때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해내는 습관적 기질입니다.
_ 모티머 J. 애들러,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할 수도 있는 것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을 모토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지, 혹은 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예를 들자면, 임산부 배려석이지만 차내에 임산부가 없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횡단보도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파란불이라 도로에 달리는 차가 없으므로, 나는 무단횡단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병장권신수설에 따라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병장이고, 어차피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일이므로, 나는 세탁기를 돌리려는 후임병에게 내 빨래도 같이 해 놓으라고 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을 단호하게 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특히, 내가 앉지 않아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 앉을 게 뻔히 보일 때, 다른 이들이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때, 나도 이등병 일병 시절에 병장들의 빨래까지 해줘야 했던 경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syo는 ‘할 수 있는 능력’ 만큼이나 ‘안 할 수 있는 능력’을 탐낸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 역시 언젠가 꼭 되고 싶은 인간형이다. 인류는 늘 저런 이들의 무모한 도전이 낳은 부산물들을 먹고 앞으로 나아간다. 부서지고 깨진 인간들의 피딱지를 씹으며 지성과 정의의 몸피가 불어난다.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첫 번째 촛불을 든 이가 있다. 그 한 송이 촛불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거센 파도가 되어 오물을 쓸어냈다. 그도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언정.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는 소극적 덕을 절제라 부르고,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타인을 배양하는 적극적 덕을 용기라 부른다면, 미덕들 앞세우는 사람들에게 역량의 여부는 오히려 덫에 가깝다. 할 수 있을수록 절제하기 어렵고, 할 수 없을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종 역량에다 기준을 세운다. 내게 할 힘이 있는 일을 못하게 막는 것을 구속이라고 부르고, 내가 할 힘이 없는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을 강요라 부른다. 절제와 구속, 용기와 강요는 외부에서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위와 역량 가운데 무얼 먼저 챙기는 지에 따라 그저 달리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어느 국면까지는, 우리가 하지 못할 말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처의 개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베트남에서 온 친구는 바나나잎에 생선을 자주 구워 먹었다고 했다. 어릴 때 마잎에 생선을 구워 먹던 기억이 났다. 마잎을 태운 향기가 생선살로 스며들어가 생선에서는 오래도록 한약을 달이는 듯한 깊은 맛이 났다. 바나나잎에 생선을 구우면 어떤 맛이 날까, 싶었다. 그리고 그 바나나잎에 누구도 화학 살충제를 뿌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_ 허수경,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_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_ 최태섭,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 읽은 책들 --





모티머 J. 애들러,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가쿠타 미쓰요,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최은미 지음, 최지욱 그림, 『정선』
전효진, 『전효진의 독하게 합격하는 방법』
-- 읽는 책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아림,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허수경,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Dr. Nicholas Romanov , 『러닝 레볼루션』
황현진 지음, 신모래 그림, 『부산 이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