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구판절판


어둑한 사당 안에서 넓은 심의(深衣) 자락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할아버지의 두 손은 공손히 땅을 짚고 있었다. 흑립(黑笠)을 쓴 이마가 땅을 대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등뼈는 단단히 긴장되어 둥그스름한 곡선을 그렸다. 뻐꾸기가 두 번 울음을 울 만큼 기다린 할아버지는 땅에서 이마를 떼고 몸을 일으켰다. 한 마리 단정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11쪽

한증막 같은 더위 속에서는 이런 굴욕감조차 급속히 증발되어 방 안을 가득 채운 눅눅하고도 불쾌한 습기로 바뀌었다. 나는 이마를 맞은 묵직한 수치와 걷잡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분노까지도 아주 먼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무감한 상태에 돌입했다. 마치 유체 이탈과도 같이, 나는 꿇어앉은 내 모습과 노려보는 할아버지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106쪽

할아버지는 몇 번 서안을 치고 탄식을 내뿜었다. 뱀처럼 차가운 할아버지의 눈길 앞에 서면 나는 항상 개구리처럼 움츠러들었다. 내 재간으로는 재학이나 상필처럼 당당하고 소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나의 육신과 정신을 가능한 한 멀리멀리 떼어 놓는 것, 그것이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107 쪽

나는 내일부터 매일 밤, 기회가 된다면 낮에도 사양치 않고 닥치는 대로 정실을 안을 생각이었다. 지겹도록 과잉 생산되지만 마땅한 폐기장을 찾지 못해 불필요한 불만과 불안정으로 부패해 갔던 나의 정액들은 기꺼이 다리를 벌려 주는 푼수데기 정실의 자궁 속으로 안락하고 행복하게 매장될 것이다.-129쪽

뚝배기에 담긴 얼룩무늬 개의 영혼이 산산이 흩어진 나의 정을 악랄하게 보하리라. -15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성을 그럴싸하게 표현해 낸 이준기 때문에 <발레 교습소>까지 내처 봐버렸다.

고등학생들이 보면 좋아할 영화겠다. 
윤계상, 온주완, 김민정. 그리고, '왕의 남자'로 완전 떠버린 이준기.

민재(윤계상)는 엄마 없이 허구헌 날 해외로 떠도는 아버지와 산다. 완전 어리버리, 답답, 숫기가 하나도 없고, 키만 멀대같이 큰 고등학생.
창섭(온주완)은 얼굴도 반반해서 춤까지 잘 추니, 내가 봐도 멋있다.
동완(이준기)은 민재보다 더 어리버리한데, 멋있는 구석이 있다. 싸움은 정말 끝내주게 뜯어말린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난 싸움이 싫어." 눈웃음칠 때 정말 여자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 맞는데... 신기하다.
수진(김민정)은 대학원서 쓰는 게 정말 코미디다. 되게 공부 잘하고, 말빨도 되게 뛰어난데, 어쩜 그리 어리버리하고 답답한지...
발레 선생이란 사람은 또 어떻구...

구차한 발레 선생과 발레 교습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영화 역시 진부함의 극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재미있었다. 간간이 웃기고, 허를 찌르는 대사도 감각 있었구... 물론, 감독의 취향을 종잡을 수 없는 연출력은 놀라기에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이종원이 우정출연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일단 나이가 어린 게 좋을 것 같다. 즉, 누구나 좋아할 영화는 전혀 아니다. 물론, 그러니까 흥행을 못한 거겠지만... ^^;

20살 젊은이들은 10년 후 서른이 되는 자신들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서른이 넘은 사람들도 여전히 10년 후 마흔이 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누구나 그렇게, 그냥 주어진 삶을 살다 보면 서른도 되고, 마흔도 되고, 자식도 키우고(?), 손주도 보면서 그렇게 사는 거겠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져 2006-01-1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일단 타임머신부터 섭외해야겠군요.
그러다 너무 어린 나이로 가면 낭패..^^
비디오가게 가면, 눈에 띄면 확~ 잡아채서 봐야겠어요.

moonnight 2006-01-1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한 번 보고 싶다 생각은 했었건만 아직도.. ;; 그, 그런데 이 영화에 이준기가 나오는군요. 봐야겠네 ^^;

하루(春) 2006-01-1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하하~ 기회가 닿길 바랍니다.
moonnight님, 공길이랑 너무 달라서 처음엔 못 알아봤어요. 눈웃음칠 때야 '아하~'했죠.

클리오 2006-01-16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 보고는 못알아보겠네요.. ^^

하루(春) 2006-01-1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기대를 계속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알라디너들 모두 괜찮았다 하고, 언론에서 특히 뉴스에까지 흥행소식을 전해주고, 단 한 사람 우리 엄마는 별로였다고 하는 통에 궁금했는데 결국 극장에서 보고야 말았다.

그림자극과 인형극에도 능한 공길.

일단,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공길과 장생의 극으로 시작하는 초반부터 시선을 확 잡아끈다. 좀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5분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장생의 줄타기 솜씨가 대단하다. 간혹 어려워보이는 장면에선 대역을 썼겠지만 기본적으로 줄 위에서 그렇게 걸어다니려면 연습 많이 했을 텐데...

동성애, 게이 어쩌구 말들이 많은데(영화 보는 중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와 어린 아이가 "게이 아니야?" "왕이 왜 저래?" 하는 통에 조금 거슬렸다.) 원작인 연극 <爾>에선 어땠는지 몰라도 영화에선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왕에게 왕을 가지고 노는 광대극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에서 공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왕의 칼에 희생되었을 텐데... 정말 대단했다.

공길은 그저 어릴 때부터 외모가 곱상해 계속 계집(커서는 아녀자)역을 도맡아서 하다 보니 그렇게 섬세함이 몸에 밴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이 뭔지 그 참맛을 아는 광대 장생.


감우성이란 배우. 늘 이름처럼(?) 감미로운 배우였다. 내게는... 특히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정말 느낌이 좋았다. 그런 아웃사이더 같은 인물을 그렇게 해내는 배우는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했으니까... 감우성, 조만간 드라마에 나온단다. 기대하고 있는 중...

늘 선왕의 그늘에 가려진 채 열등감에 사로잡혀 국사는 뒷전인 채 기생만 끼고 사는 왕이라는 작자. 결국 자멸하고 말지만, 그래도 꽉 막힌 영감들 사이에서 가장 트인 인물이지 않았나. 벌벌 떨고, 한 번도 호탕하게 웃지도 못하는 그 답답한 정승들 틈에서 놀이의 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 귀여웠다.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지? 어~ 나는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지. 
막판엔 이 우스꽝스러운 맹인극이 슬프게 다가온다.

참, 공길 역의 이준기가 <발레 교습소>에 나왔었단다. 이제 그걸 볼 차례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벌써 2달째 극장에 안 가고 있다. 이 지독한 거부반응은 두 달 넘게 지겹도록 계속되고, 그 간의 영화관람은 겨우 얼마 전에 컴퓨터로 본 우디앨런의 <Anything Else>와 갖고 있는 DVD 관람이 전부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영화 <...ing>

작년 봄엔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영화에 쓰인 것 중 '그녀입니다'를 들은 적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ing>에 대한 좋은 기사를 접하긴 했으나, 오늘 드디어 내 눈에 들어오게 됐다. 기쁘다. ^0^

내용은 매우 진부하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미워할 수 없는 건 잘 포장한 감독의 솜씨 덕분이다.

발레리나를 동경하고, 순정만화 같은 그림을 쓱쓱 그려내고, 사시사철 왼손에 하늘색 벙어리장갑을 끼고 다니는 고등학생 민아.
그 아랫집에 이사온 사진학과에 재학중인 영재.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제 다시 또 가슴 저린 이별을 앞두고 있는 꿋꿋한 엄마 미숙.

마치 숲처럼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3층 빌라에 사는 민아.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늘에서 우산을 내려 보내고, 2층에서 3층으로 도넛을 올려 보내고, 지포라이터를 구실삼아 닐 & 암스트롱을 인질로 보내고, 1시간 후에 창밖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몰래 숨어서 사진을 찍고...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고 있었고, 편안함을,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가 예정대로, 예상대로 그렇게 끝나버리다니...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영재가 민아의 병실에서 토막잠을 자다 부시시 깨어난 후,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을 것으로 예상되는) 찍은 사진이다. 미숙이 민아의 손을 잡고 있는 그 컷이 그렇게 눈부시게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민아의 손목에는 영재가 걸어준 팔찌가 걸려 있었으니...

이렇게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이 험한 세상도 뭐 살아볼만 하겠다만, 슬프게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맑은 영화 한 편 봤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oonnight 2006-01-1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토요일 조조로 혼자서 봤었죠. 맑은 영화. 라는 말씀에 공감. 참 예쁜 영화였어요. 눈물도 주르륵. ^^

하루(春) 2006-01-1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집에서 이거 보고 오늘 발동 걸려서 '왕의 남자' 보고 왔어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헤헤
 


오늘 낮에 우연히 쇼생크 탈출에 나왔던 음악 중 피가로의 결혼, 이야기를 보고 듣고 싶어져서 트랙에 걸었는데,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팀 로빈스(배역이 생각 안 나네요 - 아, 앤디)가 간수들에게 재테크를 해준 덕에 동료 죄수들에게 맥주를 2병씩 돌리던 게 생각나서 맥주를 땄다.

저 스타우트는 며칠 전 사온 건데, 베란다에 놔뒀는데도 기분 좋게 암반수마크가 나타나줘서 다행이다.
안주는 아무리 찾아도 먹을만한 게 없어서 호두 비슷하게 생긴 견과류 5개가 전부.
심하게 취하지 않으면 '달의 제단'을 계속 읽을 예정. 아~ 좋군. 으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잘코군 2006-01-1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와 좋은데요? 전 KGB를 좋아합니다. 술은 잘 못하고 기분내고 싶을 땐 맛있는 케이지비. 이거 먹어도 전 약간 취기 오거든요. 쓰읍. 잠들고 싶지 않은 밤입니다. 영화나 한편 보고 잘까.

하루(春) 2006-01-13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GB 한번도 안 먹어봤어요. 본 기억은 나는데...
저는 대체로 하이트를 편애하는 편입니다. ^^;

Kitty 2006-01-1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맥주체질은 아니지만 굳이 마셔야한다면 코로나를 ^^

하루(春) 2006-01-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맛은 모르는데, 선전 보면 조금 당기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