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사당 안에서 넓은 심의(深衣) 자락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할아버지의 두 손은 공손히 땅을 짚고 있었다. 흑립(黑笠)을 쓴 이마가 땅을 대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등뼈는 단단히 긴장되어 둥그스름한 곡선을 그렸다. 뻐꾸기가 두 번 울음을 울 만큼 기다린 할아버지는 땅에서 이마를 떼고 몸을 일으켰다. 한 마리 단정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11쪽
한증막 같은 더위 속에서는 이런 굴욕감조차 급속히 증발되어 방 안을 가득 채운 눅눅하고도 불쾌한 습기로 바뀌었다. 나는 이마를 맞은 묵직한 수치와 걷잡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분노까지도 아주 먼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무감한 상태에 돌입했다. 마치 유체 이탈과도 같이, 나는 꿇어앉은 내 모습과 노려보는 할아버지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106쪽
할아버지는 몇 번 서안을 치고 탄식을 내뿜었다. 뱀처럼 차가운 할아버지의 눈길 앞에 서면 나는 항상 개구리처럼 움츠러들었다. 내 재간으로는 재학이나 상필처럼 당당하고 소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나의 육신과 정신을 가능한 한 멀리멀리 떼어 놓는 것, 그것이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107 쪽
나는 내일부터 매일 밤, 기회가 된다면 낮에도 사양치 않고 닥치는 대로 정실을 안을 생각이었다. 지겹도록 과잉 생산되지만 마땅한 폐기장을 찾지 못해 불필요한 불만과 불안정으로 부패해 갔던 나의 정액들은 기꺼이 다리를 벌려 주는 푼수데기 정실의 자궁 속으로 안락하고 행복하게 매장될 것이다.-129쪽
뚝배기에 담긴 얼룩무늬 개의 영혼이 산산이 흩어진 나의 정을 악랄하게 보하리라.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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