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영화는 이런 것! <달콤한 인생>

(※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감독이 ‘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람의 취향과 선호 대상은 고정되게 된다. 비평가들이 사전에 규정된 ‘작가’라는 프리즘으로 영화들을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작가 자신이 그 프리즘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앨프리드 히치콕을 보라. 초기만 해도 그럭저럭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던 그가 거장이 된 뒤부터 서스펜스 장르에 갇혀버린 건 꼭 주변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그가 툭하면 비장르 감독의 자유를 부러워했다고 해도 말이다.

김지운 역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으로 이어지는 그의 블랙코미디 전작들의 성향과 거의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장르영화인 <메모리스>나 <장화, 홍련>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작가’의 자의식엔 거의 무관심한 듯했다. 아마 <장화, 홍련>이 개봉 당시 예상외의 혹평에 시달렸던 것도 그런 비평가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평론가들도 자기가 쌓아놓은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다음 작품인 <달콤한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지운 영화’다. 그냥 김지운 영화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김지운 자신이 그 영화를 ‘김지운 영화’로 디자인한 게 분명하다. <반칙왕>으로 대표되는 그의 이전 영화들을 좋아하는 팬들이나 관객은 별 생각없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외양만 본다면 <달콤한 인생>엔 그렇게 노골적으로 자의식이 반영된 흔적은 없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식 폭력과 말장난으로 양념한 장 피에르 멜빌식 필름누아르인데(김지운 자신은 멜빌과 <킬 빌>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영화라고 말한 적 있다), 지금까지 그는 그 장르에 관심만 표해왔을 뿐 단 한번도 이 장르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컴컴한 유머를 끄집어내는 그의 개성은 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건 강요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나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자잘한 단서들이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평론가들이 난폭한 블랙코미디로 정의한 기존 틀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이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리는 건 이게 바로 <장화, 홍련>이라는 영화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김지운은 작고 하찮은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일로 번져가는 내용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주제라고 하는데…. 사실 그게 그렇게까지 뚜렷하지는 않다. 아마 <조용한 가족>과 <장화, 홍련>을 엮는 데 이 주제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메모리스> <커밍아웃> <반칙왕>에도 통할까? 말을 그럴싸하게 한다면 못할 건 없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동시에 떠올릴 만한 주제는 아니다. <달콤한 인생>에서도 주인공 선우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지우려고 한다는 행동 동기는 <장화, 홍련> 때만큼 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봐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를 먼저 만든 뒤에 그에 맞는 구체적인 줄거리가 따라온 것 같다.

<장화, 홍련>의 쌍둥이 영화 <달콤한 인생>

여기서 자꾸 <장화, 홍련>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그건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가 <장화, 홍련>의 거울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조와 공통점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의도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먼저 공통점을 보자. 두 영화의 주제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장화, 홍련>의 수미와 은주,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강 사장은 모두 비교적 하찮은 일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실수와 의사소통의 차단 때문에 피 튀기는 비극으로 서로를 몰고 간다. 하지만 이 기초적인 주제와 기본 설정을 제외하면 두 영화는 거의 완벽하게 반대이다.

우선 영화의 성별. <장화, 홍련>은 무력한 아버지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여자 캐릭터들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기능적인 역할만 간신히 하는 여자 한명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액션의 진행 방향 역시 반대이다. <장화, 홍련>은 기본적으로 내성적이다. 모든 액션은 겹겹으로 쌓인 위태로운 정신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과정이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모든 폭력은 육체적이고 외향적이다. 당연히 캐릭터의 깊이도 달라진다. <장화, 홍련>의 수미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다층적인 캐릭터라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강 사장은 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수미만큼이나 괴물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얄팍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성격 역시 정반대라면 반대이다. 수미는 기본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캐릭터였다. 수미가 겪는 모든 일들은 따지고 보면 그런 자기혐오에서 탈출하려는 의미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선우와 강 사장은 둘 다 노골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자기 확인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능력이 없다. <장화, 홍련>의 호사스러운 화면이 주인공의 자기혐오적인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달콤한 인생>의 때깔 고운 화면은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한다. 한마디로 이 모든 건 ‘폼’인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자들은 ‘폼’ 빼면 그냥 죽는다.

순전히 불안정한 정신의 고뇌로만 구성된 <장화, 홍련>과는 달리 <달콤한 인생>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민도 쌓일 만큼 오래 남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화엔 고민이 쌓이는 정도를 재는 척도까지 있다. 영화 중간에 선우가 차를 타고 가다가 욕을 하는 건달들을 지나치는 장면을 보라. 선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차를 따라잡아 애들을 팬다. 건달들이 욕을 하는 순간부터 선우가 그 차를 따라가는 순간까지가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자발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은 죄의식처럼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유일한 감정은 억울함과 불쾌함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기네들이 세상 중심에 앉아 있는 줄 아는 참을성 없는 쩨쩨한 어린애들인 것이다.

이 완벽한 대칭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종의 게임일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중인격 증상이 있는 청개구리처럼 자신의 전작을 뒤집는 영화를 만드는 건 새 작품의 아이디어를 여는 쓸 만한 방식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 <달콤한 인생>은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직범죄라는 음습한 직업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대한 꽤 정확한 분석이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얄팍한 사고와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즘 그리고 그들을 거름삼아 자라는 똥폼. 선우가 자신의 호사스러운 방 안에서 섀도 복싱을 하는 마지막 신은 이 주제를 고래고래 외쳐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감독이 좋아하는 장 피에르 멜빌을 끌어들인다면, 이 영화는 비교적 심각한 <암흑가의 세 사람>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의 로맨티시즘을 시치미 뚝 떼고 은근히 놀려대는 경향이 있는 <사무라이>쪽에 더 가깝다.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멋있는 전문가인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무라이>의 제프 코스텔로와는 달리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도대체 숨을 구석이 없지만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삼부작도 나올까

그러나 <달콤한 인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는 지금 내가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아니다. 다시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전작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의 이 완벽한 거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분이 나에게 묻는다면, <달콤한 인생>이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외쳐대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우선 <달콤한 인생>은 <장화, 홍련> 역시 ‘김지운 영화’의 일관적인 흐름 속에 통합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는 역할을 한다. DVD에 따로 평론가들에 대한 반박 섹션까지 마련할 정도였으니, 김지운이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이 영화를 가볍게 넘긴 평론가들의 생각을 교정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컴컴한 폭력과 어처구니없는 유머가 결합되어 있는 모범적인 김지운 영화를 만들면서 <장화, 홍련>의 주제를 뒤집어 재활용한다면? 그리고 그게 처음부터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걸 밝힌다면? 그건 꽤 재미있는 반격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멋있다. 생각해보면 <조용한 가족>부터 꾸준히 탐구해왔다는 것도 사실인 듯하고. 그렇다면 <달콤한 인생>으로 일단 기반을 확인해본 뒤 다시 본격적으로 확장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전의 작품에도 그런 주제가 숨어 있다는 걸 역으로 읽어내어 이론 무장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긴 역사란 언제나 현대를 구심점으로 쓰여지는 법이니, 이 역시 특별히 신기한 일은 아니다.

독심술사가 되어 감독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는 한, 이 모든 건 그럴싸한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꽤 괜찮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추측이기도 하다. 박찬욱이 복수 삼부작을 찍는다면, 김지운이라고 ‘돌이킬 수 없는 일’ 삼부작을 찍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삼부작은 대부분의 경우 시리즈에 대한 자의식이 가장 심한 3편이 가장 약한 법이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세 번째 영화가 더 가능성이 있다. 의도적이고 소재와도 완벽하게 맞긴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결코 깊이있는 작품이 아니다. 좀더 깊이있고 입체적인 시도를 할 영역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글 : 듀나          출처 : 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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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5-04-1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화홍련,이 달콤한 인생과 쌍둥이 영화라니..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군요...

하루(春) 2005-04-19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며칠 전 쓴 '달콤한 인생'리뷰에 김지운 감독이 한 말을 이해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해설이 되는 것 같아서요.

날개 2005-04-19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보기전에 영화평을 이리 자세히 읽어서 어쩌자는 걸까요...ㅠ.ㅠ
이거 읽고 아래글 다시 읽고.. 저 왜 이러죠? 이러다 영화보면 꽝인데..

하루(春) 2005-04-1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아예 안 보는 게 방법이 될 순 있죠. ^^;; 클리오님이랑 날개님 너무 재밌어요. 참, 루시드 폴 앨범 잘 들으세요. 들을수록 다른 느낌이 나더라구요. 제 추천이 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은 하리라 굳게 믿으며~^^

비로그인 2005-04-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영화보기 전에 이런 글 읽으면 대략대략 낭패...;;;

하루(春) 2005-04-2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비숍님도 '달콤한 인생'을 안 보시게 되는 건가요? 멋있는 영환데... --;
 
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가 만족스러워서 주저없이 선택한 책이다. 매우 가볍고, 내용은 재미있어 집중만 하면 금방 다 읽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

16세기엔 여성들도 집에서나마 아버지께 글을 배웠고, 집안에서의 영향력도 남성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결혼 후 시댁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무는 것이 관행이었다. 재산상속도 형제자매간에 차별없이 받았다. 또한, 부모님의 제사를 아들 딸 구분없이 돌아가며 지내는 '윤행'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주자학이 사회 전반을 주도하게 되면서 가부장제가 만연하게 됐고, 그로 인해 재가 금지, 부계 적장자 상속, 남존여비, 외출 제한, 호된 시집살이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여성들- 심지어 지금까지도 볼 수 있는 -의 한스런 삶이 펼쳐진다.

향랑이 살던 시대는 가부장제가 만연하기 직전이었기에 "끼인 세대"였지만, 끼인 세대의 삶은 끼어 있어서 더 한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자기 주장을 하고 싶지만 들어주는 이 없고 자기 몸 하나 누일 방 한칸 있으면 혼자라도 원이 없겠는데 그마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향랑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누가 알리...

'부부는 삼강의 근본이요 인륜의 근원이니,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데 있어서 칠거의 악을 범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라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것은 결국 여자들을 옥죄는 악행이 되고 만다. 시도가 좋았다 할지라도 부작용이 더 큰 걸 알았다면, 폐지를 고려해야 옳은 건데 어째서 세상이 이리 돌아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향랑의 사후 시아버지와 계모, 남편을 처형한 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향랑을 비롯한 그 시대의 소수계층을 그린 책을 보는 것은 반갑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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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4-1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가 오죽이나 잘났척하고 까탈스럽게 굴었으면 이혼을 당했을까..하던
친정집의 새어머니가 향랑에게 퍼붇던 가시돋친 말이 지금도 승질을 돋굽니다.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서 산다는 일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던 아픈 책이었습니다.

하루(春) 2005-04-1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 읽었는데, 멋지더군요. 모두들 조용히 추천을 한 리뷰를 보면 저도 모르게 숙연해져요. ^^; 여우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moonnight 2005-04-1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드시는군요. 두 분다. +_+;

하루(春) 2005-04-1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인에 작가파일 -> 알라딘이 만난 작가에 정창권님 인터뷰 내용 있거든요. 그거 읽어보시고, 괜찮다 싶으면 보세요. 좋은 책이라 생각하긴 하지만요. ^^

클리오 2005-04-19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소설적인 느낌이 진하기는 하지만, 여성의 삶이 원래부터 그러했다기보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더욱 종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의미가 크더군요. 요즘 재미있는 역사책들은 거의 역사학자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역사학계의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루(春) 2005-04-19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지껏 정창권님이 역사학자인 줄 알았어요. ^^;;

클리오 2005-04-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랬는데요.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재밌게 글 못쓰더라구요.. T.T (인터뷰에도 국문학자라고 나왔던 것 같던데...)
 
김윤아 2집 - 琉璃假面 (유리가면)
김윤아 노래 / 티엔터테인먼트/코너스톤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중세시대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검은색 베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사진을 보며 어떤 곡이 흘러나올까 상상했다. 사진의 분위기만으로도 신나는 노래가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하기는 힘들다.

턴테이블의 바늘소리가 지직지직...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흘러나온다. 작년에 라디오에서 많이 나왔던 건 '夜想曲'이었는데, 김윤아의 팬들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꼽지 않을까 싶다. 청명한 목소리를 들으며 우울과 불안을 느끼는 내 영혼의 자리를 스스로 좁혀 나간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엔딩에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김윤아가 돌림노래처럼 '아아아~' 하는 부분에서는 살짝 소름도 끼친다.

뒷심 좋은 가창력의 소유자. 자신의 노래실력을 맘껏 뽐내며 공작 수컷처럼 멋지게 날개를 펼친다. 묘한 분위기에 젖어들어 한없이 나른해진다. 빨리 정신을 차려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CD는 어느새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편곡, 연주했다는 봄이 오면 G를 들려준다. 이병우의 기타연주는 놀랍다. 연주하는 그를 본 적이 있다면, 그 모습을 상상하며 들어보라. 봄의 풍경 속에서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날리며, 꽃에 취해 있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곡에 대해 써볼까? 그래, 미저리. 이게 좋겠다. 왜 이 노래는 트로트 같다는 생각이 들까? 어쿠스틱 피아노로 시작한 연주는 트럼펫 연주가 흘러나오는 간주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오오, 지워질 기억이여.

아스라이 잦아드는 마지막 빛의 긴 여운이여.

(중략) 사랑하여, 그댈, 사랑하고 사랑하여 우리의 마지막 순간엔 그대 내게 돌아와 주리라 믿었지.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봄이 오면 P의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발목을 붙잡는다. 쿵짝쿵짝 손가락이라도 까딱까딱하면서 듣게 되는 이 곡은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나마 이 앨범에서 가장 밝아서 좀 튀는 곡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김윤아의 음악을 신봉하는 내가 더이상 생경하지 않다. 다만, 작년에 나온 걸 이제서야 산 걸 조금 미안해 할뿐이다.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모습의 일부는 김윤아의 팬일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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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5-04-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셨군요. 아, 미저리라는 노래도 있군요. 시디를 사서 거의 일 년째 자주 듣고 있건만, 잠자리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틀어놓고는, 야상곡쯤에선가 금세 잠이 들어버려서 사실 저는 음.. 저런 제목의 노래도 있었나, 하고 갸우뚱하는 중입니다. 가서 시디 껍질 벗겨놓고 한동안 들여다봐야겠어요. 사실 시디를 사면 맨날 알몸만 올려놓고 즐기는 타입인지라... 게다가 늘 자장가처럼 즐기는 타입인지라... 암튼, 님의 리뷰를 계기로, 유리가면과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와 사랑지나고나면 아무것도 아닌...을 눈물나게 좋아했는데, 들을수록 야상곡의 흐드러진 한숨에 취하게 되더군요. 그 여자가 꽃지네 꽃이지네... 라고 외치면, 정말로 세상의 모든 꽃들이 우수수 떨어져버릴 것 같고 말이죠... 에고, 사설이 길었습니다. 말걸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문 두드리고 갑니다.. 앞으로 자주 뵈어요... :)

하루(春) 2005-04-1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래는 그랬죠. 노래는 다 아는데, 제목은 하나도 모르는... 리뷰를 쓰려니(좋아하는 가수라 예의상) 조금 부지런해졌습니다. 제 리뷰는 향수로 치면 first note에 해당하는 거라 생각해요.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느낌이 달라지고 나중엔 제가 정말 끝까지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잖아요.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나미님의 서재는 제가 가끔 가서 보고 오곤 했었죠. 이제야 그 티를 냈지만요. 그런데, 혹시 그 도너츠 크리스피 크림인가요? 그거 요즘 엄청 뜨던데...
 
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휴~ 힘들다. 공짜로 책을 얻는 대신 리뷰를 한 편 올리라는 주문은 가혹한 것이다. 두꺼운 SF를 읽고 리뷰를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책이 튼튼하기 그지 없어서 책장을 넘긴 채로 기다려주지 않아 더 힘들었다.

'대혼란(The great chaos)'이라는 챕터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대혼란'이 아닐까? 어차피 가상이니까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지금의 상황을 볼 때 충분히 예측 가능한 - 물론, 일정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춰야 하겠지만 - 미래 보고서라..

적어도 환경 문제로 우리가 사는 이 작은 별이 존립을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연파괴로 인한 재앙이 가장 무서운 일 아닌가.

이런 무시무시한 미래를 보면서 소망했던 게 3가지 있다. 1)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노벨상의 쾌거를 이뤄내길 2) 암정복은 우리나라에서 해내길 3) 우주엘리베이터가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스필버그의 영화 <A.I.>의 상황만큼이나 끔찍해 보였지만, 이것 하나만은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지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 '책과 함께'의 담당자께 드리는 글 : 리뷰 쓰느라 힘들긴 했지만, 사실 이상으로 사실감 넘치는 과학책을 읽게 되어 기쁩니다. 리뷰를 올려야 하는 기한이 15일까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게으른 탓에 이제 올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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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05-04-1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SF 영화를 봐도 디스토피아쪽으로 그려놓은 걸 보면 미래에 대한 예측이 어두운 쪽인 거 같고, 왠지 그게 사실일 것 같아 무서워져요. ㅠㅠ

하루(春) 2005-04-1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히...
 


주인공인 이병헌(김 실장)이 초콜릿 무스를 먹고, 각설탕을 넣은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이 하나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너무 뻥이 세다고 할까?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리뷰를 읽어도 무슨 얘긴지 눈에 쏙쏙 박히지 않는다. 그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말쑥하게 꾸며도 폐인 같은 김지운 감독의 새로운 도전도 매우 궁금했다.

조용한 가족 -> 반칙왕 -> 장화, 홍련 -> 그리고, 달콤한 인생이라니... 이 사람 영화 이력이 참 다이나믹하다.

달콤한 인생

영화의 절반 이상을 주도하는 음악은 La dolce vita이고, 선우가 죽음을 맞는 공간은 la dolce vita라는 곳이고,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bittersweet life이다. 다 달콤한 인생인데, 영어제목은 우리나라말로 하면 달콤씁쓸(혹은 쌉싸름)한 인생이 된다.

인생의 단맛을 보기도 전에, 쓴맛만 진창 즐겨야 할 처지가 된 김선우. 그 바닥에서 어찌 보스의 어린 애인을 넘보는 게 용서가 된단 말인가! 자신과 같은 급의 조직원에게 명령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을 보는 건 내내 괴로웠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어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외면한 아줌마를 의자에 묶어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움의 하나였다. 하나 더, 백 사장(황정민 분)과 같은 조직의 넘버 2(김뢰하 분)에게 복수 - 4발씩을 쏘아 서서히 말단(발 혹은 다리)부터 죽여가는 - 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나에게 미쳤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빛의 대비

영화의 전체를 감싸는 분위기는 검은색과 밝은 조명의 대비다. 밤 장면과 어두운 실내가 주된 장소이긴 하지만, 희수네 집 거실의 자연광조차 미로를 지나오는 것처럼 꺾여서 들어온다. 총기구매상을 만난 흙먼지나는 공터의 색감은 <트랙픽 Traffic>의 한장면(그러고 보니, 이 제목의 뜻은 밀거래다)이 생각나게 한다. 빛을 잘 사용한 우리나라 영화로는 최고로 꼽고 싶다. 이 영화 이전에는 <살인의 추억>이라 생각했는데...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연기조화

역할의 경중을 떠나 조화를 이룬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이창동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병헌 : 이 사람의 연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중독>에서의 모습이었다. 사랑에 미쳐서 앞뒤 안 가리고 형수를 차지하려는 그의 모습이란... 이번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 건 반듯한 몸매와 얼굴표정이었다. 배우는 역시 아무리 뛰어나도, 감독을 잘 만나야 폼이 제대로 산다.

김뢰하 : 플란다스의 개를 거쳐 살인의 추억, 연극배우에서 영화배우로 거듭난 최고의 조연배우. 대학로의 어느 극장 앞에서 본 적 있는데, 싸인 못 받은 게 안타깝다.

황정민 : 이 사람은 주된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인데, 역시 대단하다. 이 사람의 영화 중 <로드무비>를 아직 못 봤는데, 얼른 보고 싶다.

오달수(명구)와 러시아인(미하일)의 콤비 : 코엔형제의 영화 <파고>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다가 사고를 내는 장면은 가장 웃기고 재밌었던 것 같다.

선우가 납치되어 매달려 있던 곳은 실제 수산물 공판장이라는데, 그 곳 특유의 분위기도 모자라 구더기까지 데려왔단다.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져 구더기가 활동을 안 해 별 소용은 없었다지만... 우리나라 영화 감독들의 완벽성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느와르 액션 분야의 최고가 아닌가 싶었다.

김지운 감독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를 보지 않았고, 미국의 30-40년대 느와르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멋진 볼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단, 흠을 잡자면 에릭이 맡은 역할은 이해가 안 간다. 왜 그 놈이 김실장을 처단하는지... 단순히 그도 복수를 한다는 설정인가? 또, 에릭이 맡은 역은 무명 혹은 연기력 뛰어난 조연배우가 맡았어야 더 옳지 않았을까. 에릭이 총을 돌리면서 들어오는데, 웃음이 나왔다.

김지운의 말 :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를 두편밖에 안 했다는 생각도 든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 이렇게 한편.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이렇게 한편. 두편씩 같은 성질의 영화들인 거다.  -->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영화를 이렇게 짝지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이 사람의 영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구나.

설탕을 안 넣어서 달콤하진 않지만, 우유를 넣어 목넘김이 부드러운 카푸치노를 마시며, <달콤한 인생>의 감상을 적는 모습. 그럴듯 해 보이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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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4-15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나 책을 제가 먼저 보기전에는 리뷰를 잘 안 읽는 습성이 있어서.. 대충만 읽었어요.. 근데, 그것만으로도 땡기네요...
아무래도 이병헌이 먹은 저 초콜릿 무스와 각설탕을 넣은 에스프레소 때문인가봐요..ㅎㅎ

하루(春) 2005-04-15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운의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워서 좋아요. 보세요.

클리오 2005-04-1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알라딘 분들의 평이 거의 절반쯤으로 엇갈리는 것 같군요. 문명이 있는 곳(^^)에 진출할 기회가 있다면 한번 꼬옥 봐야겠습니다.

하루(春) 2005-04-1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 끄기 직전에 다셨군요. 그 곳에서도 무사히 관람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먹이 운다'도 솔직히 보고 싶긴 한데, 저는 김지운 감독을 더 좋아하거든요. ^^

클리오 2005-04-19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나의 글을 읽고 이 글을 다시 보러 왔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생각과 듀나의 생각이 일치하더라도, 저로서는 이해가 잘 안되긴 합니다. (물론, 달콤한 인생도 아직 안보긴 했지만요..)

하루(春) 2005-04-1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듀나에게 메일을 보내 볼까요? ㅎㅎ~
어제 정혜신 님의 칼럼 '공개적 마스터베이션'을 읽고 불만이 있어서 메일을 보냈는데 뭐라 답장이 올까 궁금합니다.

클리오 2005-04-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하루님. 역시 행동하는,,,, ^^ 근데 혹 어떤 점이 불만이셨는지 말씀해주실래요? 저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요....

하루(春) 2005-04-19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답장 받아보고, 공개할만하다 생각되면 살짝 알려드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