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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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 (<레티시아>, 448쪽)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읽기를 마친 책, <레티시아>가 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물론 이 책은 지난해 말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굳이 새해에 읽고자 집어 들었던 책은 아니다. 새해 첫 책으로 골랐다면 아마 조금은 밝고 희망적인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런데 <레티시아>는 어둡고 암담하며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레티시아>는 좋은 책이다. 지난해 여름에 사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017년에 읽었다면 2017년의 좋은 책 목록에 올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레티시아>는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 문학이다. 열여덟 살 소녀가 실종되었고 잔인하게 죽임 당했다. 범인은 곧 잡혔지만 죽은 소녀의 시체를 찾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티시아>는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이반 자블론카’가 그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온갖 관련자를 인터뷰하여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완성해냈고 이 책으로 2016년에 프랑스 메디치상, 르몽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오른다. 그 작품 또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인터뷰하고 기록하면서 써낸 르포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카포티의 그것과 다른 점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죽임을 당한 소녀 ‘레티시아’와 더불어 그녀의 쌍둥이 언니 ‘제시카’의 삶을 그리는데 더욱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면 미디어는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중심으로 그/그녀가 얼마나 흉악한 인물인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요즘 이 땅을 뒤흔든 몇 건의 끔찍한 사건들- 십대가 유치원생 아이를 납치해 잔혹하게 살인한 사건, 이영학 사건, 자신의 아이를 친부가 죽여 놓고도 마치 살아있는 듯 연기를 하며 급기야 실종 신고까지 한 사건을 보라. 피해자는 사라지고 범죄를 저지른 이의 가정환경, 생활형편, 평소의 취미 생활 등등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들이 얼마나 엽기적이고 잔혹하며 흉악한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래야만 대중의 분노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전율하면서 읽었지만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카포티는 범죄자들의 인간 내면을 묘사하는데 놀랍도록 치밀했다. 그들을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미화하기도 한다. 특히 ‘페리 스미스’에게는 카포티가 틀림없이 개인적 감정(그것이 연민이든 사랑이든)을 가졌으리라 짐작되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잔혹한 범죄자가 때로는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레티시아>에도 레티시아를 죽인 끔찍한 범죄자 ‘토니 멜롱’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니 멜롱 또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작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로 말미암아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렇게 범죄와 술, 마약으로 이어지는 생활에 젖어들면서 정상인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끝내 한 소녀를 잔혹하게 납치하고 살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선은 감정을 배제한 기록에 가깝다. <레티시아>의 주인공은 절대로 가해자 ‘토니 멜롱’이 아니라 피해자 ‘레티시아’임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있다.


이반 자블론카는 ‘내 책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 레티시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갖는 관심은 마치 은총으로의 복귀처럼,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 줄 것’(9쪽)이라면서 이 책이 ‘토니 멜롱’이 아니라 ‘레티시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녀가 죽은 뒤에도 미디어의 희생자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에 처박혀서 마치 없는 듯이 지내는 레티시아’(11쪽)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독자는 <레티시아>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한 소녀의 안타까운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낸 사건으로 정의 내린다. 남성(들)에 의해 삶이 무너지고 파괴되다가 끝내 잔혹하게 죽임 당한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한다. 이반 자블론카의 이러한 주장은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레티시아(그리고 제시카)의 삶에는 ‘세 가지 부당함이 있었다. 하나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기만적인 위탁가정 양부 사이에서 보낸 유년기, 다른 하나는 18세의 나이에 맞은 잔혹한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사고 기사, 즉 죽음의 구경거리로의 전락이 그것’(193쪽)이다.


레티시아와 제시카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인 ‘프랑크 페레’는 술에 취해 툭하면 아이들과 아내를 학대하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였다. 때로는 레티시아와 제시카를 던져버리기(!)도 하고, 아내를 협박할 용도로 아이들을 이용한다. 그런데다가 아내에게는 잦은 폭력과 강간이 이어졌다. 결국 레티시아와 제시카의 엄마인 ‘실비 라르셰’는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고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프랑크 페레는 감옥까지 드나들고 엄마는 아이들을 돌볼 상태가 전혀 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쌍둥이 자매는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그런데, 그 위탁가정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가정은 평화로웠고, 좋은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는 또 하나의 끔직한 비극이 숨어 있었다. 위탁가정의 양부로부터 두 자매는 온갖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제시카의 경우가 특히 더 심했다. 제시카는 이 가정에 완전히 입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양부의 성추행을 묵묵히 견딘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생은 살해당하고, 위탁가정은 해체되고, 양부의 범죄를 털어놓은 죄 아닌 죄로 위탁가정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제시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동생, 입양가정, 순결, 삶의 기쁨, 익명성 그리고 평온을. 그녀는 동생이 죽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파트롱 씨의 노리개였다는 걸 알게 된 가족이 위기를 맞은 후에야 침묵을 깨기로 결정했다. 청소년기 내내 그녀는 가족의 사랑과 안정적인 생활, 그리고 어딘가 있을 곳에 대한 바람의대가로 위탁가정 아버지의 추행을 견뎠다. 약간의 애정과 자신의 몸을 맞바꾼 것이다. (398쪽)


<레티시아>를 읽다보면 레티시아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범죄자인 토니 멜롱의 가정, 그리고 레티시아의 아버지였던 프랑크 페레의 가정 등 거의 모든 집안에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 받는 어머니 구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레티시아의 위탁가정 또한 결국 그 집안의 가장인 ‘질 파트롱’의 지속적인 성추행(위탁가정으로 왔던 소녀들은 레티시아와 제시카만이 아니었다. 질 파트롱은 나머지 다른 소녀들에게도 성추행을 지속적으로 해왔음이 밝혀졌다)이 있었다. 이반 자블론카는 이렇게 프랑스의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학대받고 죽임 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폭로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폭력은 반복되는 모욕, 위협적인 행동, 희롱, 정서적인 협박, 심리적 압박, 아이들에 대한 위협, 강제적인 성관계, 따귀 때리기, 구타, 가혹 행위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목적은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교살되거나 총에 맞아 죽은 가정주부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십 통의 욕설 문자메시지의 표적이 되었다가 끝내 맞아 죽은 전처들,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여성들이 해마다 100명 이상이나 나온다. (36쪽)


레티시아는 유년기 때부터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내에서 친부와 양부에게 구타와 학대 성추행 등 온갖 폭력을 당하다가 끝내 사회에서 만난 남자에게 납치되어 잔혹하게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반 자블론카는 명백히 레티시아의 죽음이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죽임까지 당하고 마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티시아는 구타당하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렸다. 그녀의 시신은 금속 톱에 의해 토막이 났고, 쓰레기통에 담겨 있다가 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 몇 시간 만에 생기발랄한 소녀가 살덩어리, 피투성이가 된 사지, 잘린 머리, 시멘트 블록이 달린 몸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소멸이, 중단된 구강성교로부터 시작된 시퀀스를 매듭지었다. 그녀의 내면에 굴복해야 할 여성이, 깔아뭉개고 파괴되어야 할 여성이 있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벌이자 동시에 복수이기도 한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 혐오 범죄이다. (429쪽)


<레티시아>를 읽노라면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저 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어진다. 이런 사건은 전 세계 여성,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임을 알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게 어떻게 여성 혐오 범죄이냐고 묻는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범인은 그 화장실에 들락거린 수많은 남성들은 그냥 둔 채 한 여성만을 죽였다. 더더군다나 그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레티시아를 죽인 토니 멜롱 또한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No’라고 말한 순간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망이 레티시아의 거절과 함께 좌절되자 더 이상 그 소녀를 지배할 수 없음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토니 멜롱의 어머니가 만일 자신이 아들에게 ‘No'라고 했다면 아들은 자신조차 죽였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점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남성들의 폭력성에 이반 자블론카는 크게 분노하고 개탄한다.


남성적인 의미로서의 인간은 더 나쁜 존재다. 가끔 내가 제시카의 곁에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살아오는 내내 남자들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 분란이 생기면 커터 칼로 해결하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이 들고 있어야 하는 키친타월에 정액을 쏟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을 칼로 찌르는 것도 닭의 목을 자르듯 당신의 목을 자르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쾌락의 대상, 노리개일 뿐이다. 또한 장관들, 지도자들, 텔레비전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 알고, 명령을 내리고, 옳은 사람들, 당신에 대해, 당신의 위에서, 당신의 속에서, 당신을 통해 말하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다. 결국 언제나 남자들이 이긴다. 그들은 당신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성이 수치스러워졌다. (445쪽)


책을 덮고 나서도 ‘레티시아’나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범죄자인 ‘토니 멜롱’이나 ‘질 파트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알라딘에서 이 책과 관련한 리뷰들을 보다가 그만 ‘레티시아’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정말 앳된, 평범한 소녀의 웃는 얼굴에 더 마음이 시렸다. 열여덟 짧은 생을 남성들의 온갖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참혹하게 죽은 소녀. 그녀가 이제는 정말 평온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남겨진 쌍둥이 제시카의 앞으로의 인생은 부디 폭력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운다. <레티시아>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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