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출간된 책 가운데 좋았던 책들을 정리해봤다. 나는 문학을 많이 읽는 터라 거의 문학 책이다. 



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지난해 가장 좋았던 책을 꼽으라면 단연 첫 순위에 놓는 책이다.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는 보물 같은 책이 많은데, 그레이엄 그린의 <정원 아래서 외 52편>도 그중 하나다. 그레이엄 그린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극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이미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과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권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우울증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절망의 결과물들이 바로 이 찬란한 작품들이다. 고통에서 빚어낸 결과물. 그렇기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진실’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알렉시 / 은총의 일격>
이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언급한다. 지난해의 (뒤늦은) 발견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별 기대 없이 펼쳐 들었다가 전율했다. 그의 문체에 홀딱 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이라니! 읽는 내내 황홀하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음을, 언어조차 금지되어 있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성애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결국 장애물 또는 덫에 걸리고 마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편지 ‘알렉시’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전한다.



이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이 책 표지에 있는 이반 부닌의 얼굴과 참 닮았다. 뭔가 섬세하고 조용하고 예민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책. 아무리 아름다운 책이라도 언젠가는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함을 알듯이,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늘 끝이 있음을. 그러기에 삶이란 어딘가 슬픈 빛을 띠고 있음을 이 책은 전한다. 부닌이 써내려간 아주 길고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한편의 서정시. 이 작품의 문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삶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담담히 전하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
이스탄불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이야기.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마음의 낯섦’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고 있지 않을까. 주인공 메블루트는 큰 부를 얻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어떤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기나긴 인생을 지켜보노라면 이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일구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 어떤 숭고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이라는 혼동과 변화의 도시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바로 ‘사랑’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온갖 마음의 낯섦조차도 모두 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 맨>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낸 연인을 잃은 한 중년 남자의 하루, 그 단 하루를 따라가면서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고독과 상실, 남겨진 이의 쓸쓸함 등 삶의 온갖 단면을 그려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스스로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는 <싱글 맨>- 이 작품의 슬픔이, 때로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진실로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싱글 맨’ 조지가 이 작품을 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분신, 아니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셔우드는 조지가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고, 조지 같은 인물을 정말 존경하지만 그처럼 기댈 곳이 없다면 자신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조지’와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셔우드 그 자신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산책자>를 통해 만난 로베르트 발저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고독한 시인이었고, 작고 미미한 것들,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누구보다 제대로 볼 줄 아는 세심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그러므로 발전과 진보와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지구라는 세계와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결국 미쳐버리고만 가엾은 영혼이었다. 그래서 <산책자>를 덮을 즈음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로베르트 발저, 그는 걷는다. ‘아무것도 아닌 세계로’ 그는 또 걷는다. ‘보잘것없고, 보잘것없는 그런 미미한 세계로’ 그러나 그 걸음걸음에서 시가 탄생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태어났다. 단편 소설일수도 있고 산문일수도 있고 때로는 시일수도 있는 그 모든 글에서 발저는 이렇게 말한다. ‘작고 미미한 것으로 돌아가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전쟁이 휩쓸고 간 두 도시, 히로시마와 느베르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광기와 욕망, 과거와 현재, 폐허와 재건. 무엇보다도 기억과 망각을 노래한다. 문학과 영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 ‘그녀’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충격으로 전율하고 마음이 몹시 아파온다. 전쟁의 폐해를, 그 참상을 이런 시나리오로 이렇게 그릴 수도 있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건조한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대화,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샬럿 대커, <조플로야>
‘욕정, 불륜, 질투, 치정, 살인’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충실하다. 주인공 빅토리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순결한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갈망한다. 이 무렵을 다룬 작품 가운데 이토록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성을 본 적이 있었던가?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여성의 미덕은 ‘순결, 경건, 순종, 가정’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샬럿 대커는 그 시절에 15세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빅토리아’와 빅토리아의 엄마 ‘라우리나’처럼 자기 욕망에 완전히 충실한 캐릭터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 말한다. ‘여자들이여, 그대들도 이렇게 살라’고-



플래너리 오코너, <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의 첫 장편 소설. 읽는 동안은 불쾌한 기분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는데, 읽고 난 뒤 한참 지나고 나서도 떠오르는 기묘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인공 ‘헤이즐 모츠’를 비롯해 누구 하나 좋아할만한, 호감 가는 인간이 없다. 극단적 편집광이자 사회 부적응자, 돈을 벌기 위해 가짜로 눈이 먼 맹인, 순수와는 거리가 먼 소녀, 가짜 목사와 거짓 선지자, 폭력 경찰관 등등. 이렇게 뒤틀린 인간 군상들이 우글거리는 ‘톨킨햄’을 배경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를 극한에 치달을 때까지 밀어붙인다. 한 번은 더 읽어봐야 할 작품.



김승옥, <뜬 세상에 살기에>
그의 수필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 한없는 기쁨을… 김승옥을 비롯해 김현, 김치수, 염무웅, 최하림, 서정인 그리고 이청준과 김광규 등 문학동인지 <산문시대> 관련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울컥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 시절이 어쩌면 우리 문학계의 벨에포크 시대는 아니었을까…. 이 수필에 수록된 삽화들은 김승옥이 직접 그린 것들이다. 심지어 그림까지 잘 그리는 인간이라니! 이 책을 복간하게 된 사연도 꽤 흥미롭다. 1977년 지식산업사 초판본은 김승옥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윤성근 작가가 녹번동 재개발지역 책 더미 속에서 발견한 뒤 간직해온 자신의 소장본을 선뜻 기증해준 덕분에 이 책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새삼 그에게 고맙다. 이 사람, 녹번동 재개발지역 책 더미 속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두근두근했을까! 그야말로 보물을 건진 심정이 아니었을까?



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에단 호크가 감독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를 보고 시모어 번스타인의 팬이 되고 말았다. 순전히 이 할아버지에 대한 팬심으로 산 책. 영화와 비슷한 부분도 많은데 책을 읽다보면 좀 더 자세히 그에 대해 알게 된다. 단순히 음악가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인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슴으로, 영혼으로 느끼게 해준다.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라는, 그의 이야기. 좀 더 아름답게 살고 싶어지고,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널리스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책.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헤밍웨이의 통찰력은 빛난다. 이 책에 담긴 글들로 만난 ‘기자’ 헤밍웨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글도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끊임없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헤밍웨이를 다시 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겐 고마운 책. 한쪽에 영어 원문이 함께 실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반 자블론카, <레티시아>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주제로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이 남성들로 인해 어떻게 산산이 파괴되어 가는지 낱낱이 해부했다. ‘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범죄의 본질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끔찍한 범죄를 다룬 책은 흔히 ‘범죄자’ 중심으로 사건을 기술하기 마련인데, <레티시아>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웠다. 이 책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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