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만 하더라도 겨울이면 코로나에서 벗어나 극장도, 여행도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꿈이었다. 코로나는 갈수록 기승이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이 속속 나오고 있다.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앗아간 이 끔찍한 바이러스도 서서히 사라지겠지. 그러나 바이러스가 남긴 상처를 지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완전한 치유가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차별과 혐오가 아닐까. 맨 처음 이 바이러스는 인종차별을 불러왔다. 중국에서 시작했기에, 동양인들이 차별과 혐오, 폭력에 시달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에서는 이 바이러스가 처음 폭발적으로 터진 곳이 종교집단이었고, 두 번째로는 성소수자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서 대규모로 유행했기에 특정 종교인과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뿐인가. 아무리 조심해도 ‘확진자’가 되는 순간 주위의 비난과 냉대, 혐오의 시선은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백신을 개발했듯 이 깊은 상처를 낫게 하는 치유제도 인간은 지혜롭게 찾아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책의 힘, 문학의 힘을 간과한다. 문학은 이 현실에서 쓸모없는, 어쩌면 몽상가들을 위한 지적 놀이 또는 허영으로까지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상에서도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위안과 위로, 지혜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차별과 혐오가 첨예해진 지금,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는 문학 작품이야말로 가장 좋은 마음의 백신은 아닐까.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에는 고달픈 현실에 지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이상 세계가 등장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 히즈라 ‘안줌’이 이곳저곳 떠돌다 무덤가 사이에 만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와 지혜로운 ‘마오즈 할머니’가 이끌어가는 ‘서우훠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두 공동체에는 차별도, 혐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와 ‘수활(受活)’, 즉 ‘고통속의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닌 ‘서우훠’ 마을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그곳에는 저마다 세상에서 배척당한 이들이 모여 산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 안줌 자신이 앞서 말했듯 제3의 성 ‘히즈라’이며, 잔나트에는 그녀처럼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조차 거부당한 여자의 시신을 씻기고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장례식장도 겸하게 된다. 죽은 이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이다.

서우훠 마을은 애초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들만 모여살고 있다. 중국의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진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되어,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외지로 떠났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이런 사정이라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이 마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 마을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폭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행운을 누리게 되고,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몸이 불편해도 서로 돕고 보듬어주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대기근에 시달릴 때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지복의 성자>의 인도, <레닌의 키스>의 중국. 서로 멀리 떨어졌고 체제도, 정치 상황도 다르지만 소외된 이들이 서로 기대고 보듬어주면서 그들만의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은 꽤 닮았다. 그런 공간이 가능하도록 애써온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른바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은 안줌과 서우훠의 마오즈 할머니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처럼 성자와 같았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들도 젊은 시절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그토록 바라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 안줌은 화려하게 꾸미고 여왕으로 군림하며 자기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갔다. 마오즈도 한때는 혁명을 통해 현장이나 여주석 등 높은 인물이 되리라는 야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상처 주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보듬고 이끌어가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이 두 ‘할머니’들의 품에서 소외된 이들은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를 읽다 보면 인간은 서로 가장 상처 주는 존재이지만 결국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컬러 퍼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상처받은 영혼 ‘셀리’에게 ‘슈그’가 그런 존재이다. 흑인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성폭행당하고, 팔려가다시피 결혼해 가부장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느라 삶이 고통 그 자체였던 ‘셀리’는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 ‘슈그’가 병들어 자신의 집에 오는 바람에 함께 살게 된다. 이 기묘한 상황 자체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데, 놀랍게도 셀리는 슈그에게 마음을 열면서 그녀로부터 위로받고 마침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다. 두 여자가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그들의 삶이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감동적이다.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신(神). 신은 셀리가 아무리 간절히 편지를 써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슈그를 만나기 이전 셀리는 끔찍한 삶을 저주하면서 신을 모독했다. 그러나 이제 슈그가 다정히 속삭인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그것’일 뿐이라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이라고. ‘좋은 걸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컬러 퍼플>, 260쪽). 누군가와 마음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인간은 상처도 씻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기어이 살아남는다.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셀리가 증명한다. 셀리는 슈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환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환대하고 사랑하면 그것은 다시 고리가 되어 다른 이에게 이어진다.

안줌과 마오즈, 셀리와 슈그, 네 여성은 저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편안하게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곳에서 폭력적인 시절을 거쳐 왔다. 자기 온몸으로 차별과 혐오를 겪었으며, 때로 억압의 대상이도 했다. <지복의 성자>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복잡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마오즈 할머니는 중국의 수많은 혁명의 역사를 제 몸으로 겪었으며 <컬러 퍼플>의 셀리는 가부장의 폭력과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상처에 쓰러져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어이 그 삶에 꺾이지 않은 것은 그 곁에 결국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과연 정말로 그곳이 무덤인지,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성, 인종, 종교,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 보통의 세상이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 세상에 비하면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공간인 잔나트와 서우훠마을이 사람들이 나아갈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까. <지복의 성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배신하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258쪽)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마음, 공감하고 연민하는 마음에서 변화는 일어난다. “나아지고 싶다면 우리 모두 어디선가부터 시작을 해야 하고,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건 결국 우리 자신이에요.”(<컬러 퍼플>, 349쪽)라는 말은 그래서 더 의미 깊게 다가온다. 차별과 혐오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코로나 시대에 이 책들은 분명 마음의 백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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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4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 읽으려고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인간 옌례커를... 기어코 읽게 하시네. 내가 잠자냥님 덕택에 한 번 더 미칩니다, 밋쳐요!
내년에 독후감 쓰겠습니다. 에휴.... 인생이 다 그렇지 뭘.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2-14 22:27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렇게 낚나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4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문동 리뷰 대회 응모작인가요?

잠자냥 2020-12-14 22: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문동 책 3권 이상으로 된 이런 리뷰가 많이 올라올 듯 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5 09:09   좋아요 0 | URL
오늘이 마감이네요...
그리하야 저도 도전해 볼까 어쩔까나
생각 중이랍니다 :> 시즌이니깐요 ㅋㅋ

<레닌의 키스>가 저랑 겹치시네요 ~

잠자냥 2020-12-15 09:36   좋아요 0 | URL
자 어서 도전하세요~ ㅎㅎ
 

두 권의 반가운 편지글이 나왔다. 다자이 오사무와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이 바로 그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편지글은 예전에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한집>이나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에서 접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서한집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으나, 다자이 오사무의 서한집은 꽤 눈길이 갔다.

다자이 오사무는 내게 적어도 청춘의 작가이다. 이십대 후반에 <인간 실격>을 읽고 얼마나 빠졌던지, 그 무렵에는 그의 작품을 구하는 대로 다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읽은 <인간 실격>은 예전처럼 강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언제는 그 특유의 멜랑콜리한 감성이 못 견딜 것 같기도 하더라. 내가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이 사람은 왜 늘 이렇게 징징대나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부터 다자이 오사무 책을 더는 읽지 않은 것 같다.  

두 책을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나란히 받아 읽었다. 무엇부터 볼까 싶은데 아무래도 좀 더 새로운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부터 읽는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겨울 밤 읽는 편지글은 이상하게도 가슴을 울린다. 편지라는 글이 그렇다. 주고받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밀한 속삭임, 고백, 다정한 말투……. 나는 언제 이런 편지를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전자우편과 메신저, 핸드폰 문자 등이 등장하고는 편지 쓸 일이 없다. 그러나 그 전에는 나도 편지를 종종 썼던 사람인데……. 아날로그적 감성에 젖어 남의 편지를 읽는 밤이 하릴없이 깊어만 간다.


요즘 자주 눈물이 난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야. 수다를 떠는 거지.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물고 혼자서 주절주절 지껄이고 있는 거야. 천마디 말 중에 한마디 진실을 찾아준다면 죽도록 기쁘겠네. 나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어. 자네도 내게 지지 말고 날 사랑해줘.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니었어. 사색도 아니었다. 학문도 아니었고. 포즈도 아니었다. 애정이다. 푸른 하늘보다 깊은 애정이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84쪽)


편지글에서도 다자이 오사무는 곧잘 징징거린다. 자주 눈물이 난다고, 슬퍼서 울었다고, 분해서 울었다고 거리낌 없이 잘도 말한다. 그는 외롭고 고독하고, 애정을 갈구한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상당하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편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삶은 왜 이다지도 곤궁하고 고달프기만 한지, 친구를 비롯해 지인들에게 돈 빌려달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 20엔만 빌려주십시오, 몇 월 며칠까지는 꼭 갚겠습니다. 지금 쓰는 작품 원고료가 언제 들어옵니다, 지금 쓰는 작품이 잘 되면 꼭 갚겠습니다 등등. 다자이 오사무의 편지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 돈 빌려달라는 소리인 것 같다. 그만큼 삶이 곤궁하고 고달픈 그.
 

저도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타인이 쓴 훌륭한 소설도 많이 읽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을 쓰고 읽는 데 전념할 생각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49쪽)

불멸의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언제나 잊어선 안 돼. 그저 거만해지라는 뜻이 아니야. 죽을 만큼 공부하라는 뜻이지.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75쪽)


물론 온통 돈 빌려 달라는 말만 있다면 이 서한집이 세상에 굳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 속에서 그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몇 번이고 새롭게 다짐하고 또 자신을 다그친다. 어떤 날은 작품이 잘 쓰여서 기분이 좋고, 또 그렇지 않은 날은 그래서 우울하다. 잘하면 아쿠타가와 상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깊은 실망에 잠기기도 한다. ‘나는 이미 유명해서 아쿠타가와 상은 앞으로도 안 될 거다. 어설픈 이류 삼류 후보자들과 같이 이름이 올랐다는 게 불쾌할 뿐’(78쪽)이라고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참다못해 상을 달라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직접 편지를 쓰기도 한다.


물질을 고통이 쌓이고 또 쌓여 죽을 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10년만 더 살고 싶어 죽을 지경입니다. 저는 괜찮은 인간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운이 나빠 죽기일보 직전까지 와버렸습니다. 아쿠타가와 상을 받는다면 저는 인간의 따뜻한 정에 울음을 터트릴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그 어떤 괴로움과도 싸워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사토 하루오에게 쓴 편지, 110쪽)

<만년> 한 권 제1회 아쿠타가와 상을 타게 될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상금, 제 반 년치 여비입니다. 늙은 어머니와 가여운 아내를 단 한 번만이라도 기쁘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에게 명예를 주십시오. <만년> 한 권만은 부끄럽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쓴 편지, 152쪽)


이렇게 구걸(?)할 정도로 상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서한집을 읽노라면 그가 인정욕구에 꽤 시달렸으며, 그것은 또 애정, 순수한 애정에 굶주린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돈에 쪼들렸기에 상금을 받아 편안하게 창작 활동에 몰두하고 싶어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그토록 고통스러운 생이라도 끝까지 붙들고 싸워서, 살아 이겨 내고 싶어 한 그의 간절한 소망이자 바람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어떤 편지에서 그는 몸을 해쳐 누워 있으면서도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죽고 싶지 않다고, ‘아직까지 조금도 일다운 일을 남기지 못했고, 마흔이 되어서야 어떻게든 겨우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절실하게 마흔까지는 살아 있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난 다자이 오사무였기에 이 살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은 참으로 안타깝게 다가온다. 더불어 ‘상냥한 사람의 표정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품고’ 있다는 그의 또 다른 편지글에서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오랜만에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을 걱정하고 인간의 쓸쓸함과 외로움과 괴로움에 민감한 일, 이것이 샹냥함이며, 또한 인간으로서 가장 뛰어난 일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상냥한 사람의 표정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부끄러움으로 저와 제 몸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363쪽)


나쓰메 소세키 편지글은 다자이 오사무의 편지와는 그 어조부터 사뭇 다르다. 나쓰메 소세키는 교사도, 교수도, 박사도 되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사는 인생에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만 써서 먹고 살아야 했던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조금 속이 편했던 것 같기는 하다. 절친한 벗이었던 마사오카 시키를 비롯해 문하생 및 제자 등 주변에 사람도 늘 많은 편이라서 그런지 인정욕구 같은 것에 시달리는 모습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은 ‘청년 시절-영국 유학 시절-도쿄대 교수 시절-아사히 신문사 시절-만년’으로 세분화 된다. 청년 시절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고, 영국 유학 시절에는 아내나 장인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자주 보인다. 그중에서도 영국 유학을 떠나 있어, 시키의 부고를 듣고도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한 채 그 애달픈 마음을 하이쿠로 써서 담아낸 편지가 인상 깊다. 무척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저린 글이다.


런던에서 시키의 부고를 듣고

양복 차림에 가을 장례 행렬도 따르지 못해
올려 마땅한 향 하나 없는 채로 저무는 가을
노오란 안개 자욱한 도시에서 춤추는 음영
함께 시 읊던 오래전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불러주는 이 없는 참억새밭에 돌아가려네.


친구나 문하생 및 제자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좋은 스승이었지만 편지를 통해 본 나쓰메 소세키는 그다지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정다감한 모습은커녕 멀리 있는 아내에게도 편지로 잔소리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계속 ‘틀니는 넣도록 하시오, 머리는 둥글게 틀어 올려 묶지 않는 게 좋겠소. 자주 감으시오.’ 등등 애정 표현은커녕 잔소리꾼도 이런 잔소리꾼이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문학자가 되는 일에 회의를 느끼고, ‘박사도 교수도 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먹고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대단한 저술도 결국 시간과 돈 문제이니,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딱히 상관없습니다.’ 토로하기도 한다. 돈을 주워 글만 쓰고 살고 싶다는 너무나 솔직한 표현에는 슬며시 웃음도 나온다.


일본에 돌아가 어학 교사 일에 쫓기다 보면 사색하거나 독서할 여유가 없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돈 10만 엔을 주워 도서관을 세운 다음 거기서 책을 쓰는 상상까지 하곤 하니 참 한심하지요.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장인에게 쓴 편지, 157쪽)


문하생이나 제자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었고, 여러 제자들로부터 존경과 아낌없는 흠모를 받았던 소세키. 그 자신도 제자들의 그런 애정을 기꺼워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편지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소세키 스스로 ‘ 나는 이래봬도 자부심 넘치는 사내라 내가 일부 사람에게 호감을 살 만한 성격을 가졌다고 자신’한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나 같은 인간이 한 학생의 머릿속을 이렇게까지 점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그 편지를 보면 미에키치 군은 매일같이 내 생각을 하다가 신경 쇠약에 걸린 사람 같더군. 내가 열일고여덟 먹은 아가씨라면 미에키치 군 생각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겠지만, 다행히 나는 요시하라에서 온 머릿기름 종지나 애지중지하는 긴양(소세키 본명인 ‘긴노스케’에서 따온 별명)이라 내 입장에선 약값을 아껴 무척 다행이다 싶네. 하지만 제아무리 소세키라도, 긴양이라도, 강사라도, 수염이 났다 해도 미에키치 군에게 이렇게까지 흠모를 받고 감사히 생각지 않는 건 아니라네. 감사함을 넘어 무서울 정도야. 미에키치 군은 내 아내보다 내 생각을 더 많이 하는 듯 하더군. (...) 나는 이래봬도 자부심 넘치는 사내라 내가 일부 사람에게 호감을 살 만한 성격을 가졌다고 자신하네만 이 정도까지 흠모 받을 줄은 몰랐다네. 자만하던 것 이상일세. 예상을 오십오륙 배 초과했어. 본디 사람은 흠모나 친애의 대상이 되면 갑자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기 마련일세. 그 흠모와 친애에 부합하는 자격을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어내고 싶은 기분이 드는군.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186~187쪽)


그가 아끼던 제자 구메 마사오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쓴 편지는 예전에 읽었을 때도 그렇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마음을 울린다. 소세키는 그들에게 ‘공부는 하나요? 글은 쓰고 있습니까? 두 사람은 새 시대의 작가가 될 생각이겠지요. 나도 같은 생각으로 두 사람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그러나 너무 초초해하면 안됩니다. 그저 소처럼 넉살좋게 나아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416쪽) 말한다. 소처럼 넉살좋게 꾸준히 나아가라는 말은 꼭 소세키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마음속에 새겨두기에 좋은 글이 아닌가 싶다. 까닭 없이 긴 편지를 썼다는 나쓰메 소세키. ‘한없이 이어져 저물 줄 모르는 긴긴 하루의 증거로서’(417쪽) 편지를 썼다는 소세키. 을씨년스러운 추위가 온몸을 파고드는 이 쓸쓸한 계절, 다정한 이에게 까닭 없이 긴 편지를 쓰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꽤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소가 되는 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늘 어떻게든 말이 되고자 하지만, 좀처럼 완전히 소가 되지는 못합니다. 나처럼 노회한 사람도 이제 막 소와 말이 교미하여 잉태한 잡종 수준에 지나지 않아요. 서두르면 안 됩니다. 머리를 너무 괴롭혀서도 안 됩니다.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끈기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불꽃 앞에서는 짤막한 기억밖에 허락하지 않습니다. 끙끙대면서 죽을 때까지 밀어야 합니다. 그뿐입니다. 절대 상대를 만들어서 밀면 안 됩니다. 상대는 끝도 없이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는 법입니다. 소는 초연히 밀고 나갑니다. 무엇을 미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답해 드리지요. 인간을 미는 것입니다. 문사(文士)를 미는 것이 아닙니다.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421~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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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또는 예술이 도구로 쓰이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선전선동을 위한 문학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문학가나 정권 찬양을 노래한 시인에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리라.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저 유럽에서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문인이나 예술가, 철학자들은 그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거나 바로 그 전력이 가장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일 문학이 냉전시대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데 일조하거나, 또는 반대로 상대 진영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면 어떨까?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은 파시즘 및 소련의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 고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그 조지 오웰이 영국 외무부 정보조사부(IRD)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으며 임종 당시 IRD에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을 정부에 넘겨주었다면? 그리고 그 대가로 IRD는 <동물농장>을 여러 나라 언어로 출간될 수 있도록 돕고, <1984>를 위해서도 온갖 좋은 일을 해주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오웰에 대한 감정이 예전과 똑같을 수 있을까? 실제로 오웰은 찰리 채플린, E.H. 카, 역사학자 아이작 도이처를 비롯한 38명을 ‘서방을 위한 선전자(propagandists)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명해서 넘겨주었다.

오웰뿐만이 아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을 비롯해, 이사야 벌린, 레몽 아롱, 버트런드 러셀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 지성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미국은 냉전을 확산하고 연장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이용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반공 성향의 지식인들을 내세운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같은 선전선동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인카운터>를 비롯한 수많은 잡지를 발행했다.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인카운터는 CIA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CIA는 1940년대 말부터 그들이 지식층 문화라고 여기는 것을 후원해 왔다고. 대부분은 한 발 물러서서 ‘다양한 재단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목적은 중도 좌파 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꾀어내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것이 지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만드는 것’(<스위트 투스>, 157쪽)이다.

<스위트 투스>는 바로 이 시기, 1970년대 초 영국 보안정보국 MI5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세리나 프룸’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수학과에 진학한 것은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는 세리나가 케임브리지대학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닌, 과학이나 공학이나 경제 분야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통 이 분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세리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문학, 그것도 온갖 종류의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당연히 전공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데 이런 세리나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나타난다. 전(前) 보안정보국 요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 ‘토니 캐닝’- 캐닝은 세리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가능성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는데, 토니는 세리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심어주고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보안정보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세리나는 토니로부터 배운 온갖 지식을 동원해 훌륭히 면접을 치르고 입사에 성공한다.

제아무리 케임브리지를 졸업해도 여성인 세리나는 요원으로 일할 수 없다. 1970년대 영국은 남녀차별이 심해 정보국에 들어간 여성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저 사무 보조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리나 또한 사무직 말단으로 몇 달을 보내며 희망 없는 상대와의 연애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던 중, 드디어 그녀에게  임무다운 임무가 주어진다. 암호명 ‘스위트 투스’- 이 작전은 지식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서방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도록 은밀히 조종하는 것이다. 작가를 포섭하기 위해 "현대의 저술, 그러니까 문학, 소설에 훤한" 세리나가 적격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세리나는 ‘세계 곳곳에서 예술의 탁월성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자유국제재단 소속’으로 위장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 ‘톰 헤일리’를 찾아간다. <스위트 투스>의 진짜 재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리나는 톰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담당할 작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단편들을 섭렵하는데, 읽을수록 이 남자가 궁금해진다. 자기 멋대로 그에 관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만났을 때 톰의 외모는 세리나의 상상과 달라 뜻밖이지만 그래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톰 헤일리도 세리나의 미모에 반했는지 첫날부터 은근히 작업을 건다. 톰은 자유국제재단에서 자기를 콕 집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반신반의하지만 조건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소설만 쓰고 싶은데,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직업을 가지면 소설 쓰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던 그에게 이런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 특별히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톰은 세리나가 국가 정보부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니까). 게다가 자기 담당자인 세리나도 꽤 매력적이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그는 덥석 이 제안을 물고,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 아름다운 여자를 연인으로 얻어 소설 창작에 몰두하는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모르는 채.

이렇게만 적어놓으니 <스위트 투스>는 단순한 첩보 스릴러 같지만, 사실 문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광이라고 부를 만한 세리나가 바로 그 문학에 대한 탐닉 때문에 보안요원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평생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도 문학 때문에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리나가 톰과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소소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작가가 좋아, 저 작가가 더 좋아, 이 작품 읽어 봤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심지어 세리나는 톰의 새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평해주는 충실한 독자이자 때로는 편집자 역할도 해준다. 톰의 작품을 읽고 그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점점 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는 세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아니 진실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 책 맨 앞부분에 사랑에도, 임무에도 실패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세리나와 톰의 사랑이 파국을 맞는다는 것, 그러고 나서 회한에 차서 그 모든 일을 세리나가 기록하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언 매큐언은 그렇게 쉽게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는 않는다.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의 숨겨진 비밀, 톰과 세리나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 등등 독자의 예상을 살짝 비껴나가면서 참으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빚어낸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와 달리 토니와 톰, 또 그 밖의 남자들의 말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세리나라는 캐릭터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여자가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고? 아닐 거 같은데, 이언 매큐언 당신이 좀 잘못 아는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모든 의구심이 풀리면서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서 언급한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언 매큐언은 이 책 끝부분에서 손더스의 이름과 함께 바로 이 책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를 통해 얼핏 접했지만 부드러운 냉전 시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프로파간다 도구로 쓰였는지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문학이라는 한 세계를 빚어내지만, 그 문학이 도구로 쓰일 때는 그 도구를 쓰는 이들이 원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냉전은 끝났지만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문학과 예술은 그렇게 이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스위트 투스>는 작품 안팎으로 무척 흥미로운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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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또 뭡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문학과 첩보요원이라니... 와.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당장 읽고 싶어요!! >.<

잠자냥 2020-11-05 15:46   좋아요 0 | URL
이거 정말 재미났어요. 제가 이언 매큐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참 재미났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0-11-05 15:48   좋아요 0 | URL
그리고 이거...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언 매큐언 몇 권 읽었는데, 칠드런 액트가 참 좋았어요.

아니, 뭐라고요?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다고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거에요? 왜죠? 영문을 모르겠네요?

=3=3=3=3=3=3=3=3=3=3=3=3=3=3=3

단발머리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이것은!! 볼드체로 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잠자냥 2020-11-05 16:1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좋아하실 거 같아서.............. 좋아하실 거면서 ㅋㅋㅋㅋㅋㅋ(아니 다락방 님은 이거 읽으시고 별로 많지도 않은데? 이럴지도 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20   좋아요 1 | URL
도대체 저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계신거에요? 네?

아무튼 살건데요, 야한 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사는거 아니에요. 그건 꼭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흥!!

단발머리 2020-11-05 16:24   좋아요 0 | URL
제가 사실 이언 매큐언을 좀 좋아하지 않습니까? 속죄도 좋았고 칠드런 액트도 좋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로다가 이 책도 1독 해야겠군요! 에헴!!!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이언 매큐언 좋아서 사는거 저 다 알아요. 야한 거 때문에 끌린 건 아니잖아요. 저처럼... 그쵸?

단발머리 2020-11-05 16:45   좋아요 0 | URL
암요암요! 딱 그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11-05 19:32   좋아요 1 | URL
요즘 알라딘에서 식스(...)하면 syo지!!
난 야한 거 많이 나오는 이언 매큐언 좋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 쓸데없이 당당한가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연말결산 댓글 1위 누구에요? 저 아니에요?

단발머리 2020-11-05 16:4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니지요?!?🙄

다락방 2020-11-05 16:47   좋아요 0 | URL
갑분1위쟁탈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5 16:49   좋아요 0 | URL
겁나 치열해서 이러다가 싸움 날 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압도적으로 다락방 님이 1위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그 다음은......... 다락방 님 절반에 해당하는 댓글로 폴스타프 님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7:16   좋아요 1 | URL
전 뭘해도 압도적이란 말예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포스트잇 2020-11-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에서 진심 놀랬습니다. 저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겨우겨우 읽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도 통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는데 뒤에 뭔 얘기가 있길래 좋다고 이 난리신지... 다시 읽어야 하는건지..
영화 <식스센스>도 초반에 너무 재미없어서 나가려다 반전에 뒤통수 맞았던 적이 있어서 또 그 경험을 하는건가 싶네요.
.......

잠자냥 2020-11-05 23: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 책은 진짜 끝까지 보셔야 해요...!
 

한 작품만으로도 모든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뉴잉글랜드 수녀>를 쓴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이 그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영미 여성 작가 단편모음집인《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올해 처음 읽었다. 그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작품 이야기는 이미 한 차례 리뷰에서 쓴 적이 있어서 이곳에서 또 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일상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 대신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고 홀로 꿋꿋하게 살아갈 인생을 스스로 택한, ‘루이자’라는 캐릭터는 좀처럼 잊기 어렵다. 그 작품에 반해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을 알라딘에서 검색해봤는데, 몇몇 책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대부분 여러 작가와 함께 실린 단편 모음집이 전부이다. 그러던 참에 이렇게 그만의 단편을 모은 《엄마의 반란》이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엄마의 반란>은 제목 그대로 엄마의 ‘반란’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보 저 사람들이 뜰을 왜 파는 거예요?” 어느 농가에서 일꾼들이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중이다. 중년 여인 ‘사라’는 남편에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왜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집 뜰을 파는지 남편에게 여러 차례 묻지만, 남편은 뚱한 표정만 지을 뿐 별 대답이 없다. 남편처럼 무뚝뚝한 아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겨우 진상을 알 수 있다. 남편은 ‘또’ 창고를 만들고 있다. 사라와 딸 ‘내니’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사는 집은 다 낡아서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집을 다시 짓거나 수리하기는커녕, 가축우리를 새로 만들거나 창고 짓는 일에만 골몰한다. 곧 결혼을 앞둔 딸은 엄마보다 더 불만인 것 같다. 이런 집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도 없고, 손님을 초대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하는 딸에게 사라는 불평하지 말라며 그 시절 엄마들이 할 만한 잔소리만 늘어놓는다.


“우리 여자들이 그저 아이나 받아내는 사람들이란 걸 모르니? 남자들을 볼 만큼 봤잖니. 요새 하는 짓 봐, 남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그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하지. 날씨를 신의 섭리로 여기고 불평하지 않듯 우린 남자들이 하는 짓에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해.”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조지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내니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곧 울 것처럼 입술을 씰룩댔다.
“두고 봐라, 조지 이스트만이라고 다를 성싶니? 아무튼 아버지를 판단하려 하면 안 돼. 뭐 어쩌게니,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온걸. 그리고 결국 우리도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잖니.” (《엄마의 반란》, 13쪽)


사라는 못을 박듯이 한 번 더 딸을 다그친다. “불평하지 마. 나도 여태 불평 한 번 안 해봤어.” 이런 상황만 봤을 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옛 시절 이야기이려니 싶어진다. 남편에게 깍듯이 존대하는 부인, 그에 비해 아내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자기 멋대로 집안일 결정을 하면서 대꾸도 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똑 닮아서 벌써 싹수가 노란 아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으니 찍소리 말고 살라고 이야기하는 순종적이고 답답한 엄마, 그런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신랑감인 ‘조지’는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왠지 불안한 딸……. 이런 가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체 이런 집구석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까 기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프리먼이 이야기를 그렇게 쓸 리가 없다. 제목 또한 ‘엄마의 반란’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사라는 이대로 참을 수 없다. 서서히 ‘반란’을 꾀하기 시작한다. 딸에게는 아버지를 판단하지 말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라는 듯 말했으나, 사라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성싶다. 일단 남편을 붙들고 이야기해 보기 시작한다. 물론 남편은 사라가 뭐라고 말하든 예의 그 무시하는 듯한, 너는 떠들어라 난 내 갈길 가련다, 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이 남자를 지켜보노라면 등짝을 한 대 갈겨주고 싶어진다. 그래도 사라가 참지 않고 할 말은 하니까 조금 속이 풀린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당신은 굳게 약속했죠. 그해가 끝나기 전에 새 집을 지어주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 당신은 계속 돈을 벌고 있고,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저축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창고를 짓고, 우사와 새 헛간을 짓더니 이제 또 창고를 하나 더 짓는다고요? 여보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혈육보다 가축들한테 집 지어주는 게 더 중요한가요?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요?” (《엄마의 반란》, 20쪽)


이렇게 소리쳐도 못들은 척 하는 남편이니, 극약 처방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사라는 드디어 뭔가를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자신이 없어질까 봐 생각나는 대로 문구를 하나 만들어서 마음에 되새기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27쪽). 그리고 사라는 ‘반란’에 성공한다. 조용한 마을에서 일상을 훌쩍 벗어난 이 일은 마을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여자들은 서로의 집에 들러 이 일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다. 모두가 일손을 멈춘 채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사라를 평하느라 바쁘다. 어떤 사람은 사라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규칙을 무시하고 반항만 일삼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헐뜯는다. 마을 목사까지 사라를 찾아와 충고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라에게 한방 먹고 터덜터덜 돌아선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통쾌하다. 사라의 반란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엄마의 반란》에 실린 네 작품은 거의 이렇게 일상의 작은 ‘반란’을 통해 주인공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쟁취하거나 마침내 이룬다. 그리고 대부분은 엄마인 ‘사라’를 제외하고는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갈라 드레스>의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두 중년 자매, <뉴잉글랜드 수녀>의 ‘루이자’, <빗나간 선행>의 두 노파 ‘샬럿’과 ‘해리엇’ 등 모두가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또는 둘이 살아가며 그 삶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가난하고, 늙고 쇠약해져서 겨우 삶을 유지해 나가더라도 자신들만의 공간과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홀로 잔잔하고 평화로운 하늘 아래 부드럽게 펼쳐진 새로운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길은 너무 곧고 한결 같아서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으며 ‘또한 너무 좁아서 옆에 누군가와 함께 걸을 공간이 없’(<뉴잉글랜드 수녀>, 80쪽)는 그런 삶이다. 그러한 삶이 연인, 또는 이웃 등 타인들로 인해 파괴되는 일을 그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안온한 일상이 파괴될 것 같으면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채 당당히 홀로 맞서 자기 삶을 지킨다(<뉴잉글랜드 수녀>). 또 누군가의 선행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단연코 그 선행을 거부하고 자기 삶을 지키고자 나약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용기를 발휘하거나(<빗나간 선행>), 나름의 재치를 발휘해 품위를 지켜나가고, 뜻하지 않은 선물이 주어져 삶이 조금 여유로워졌을 때는 그것을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여성에게 베푸는 아량을 보이기도 한다(<갈라 드레스>). <갈라 드레스>는 여성간의 연대도 엿보이는데,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자매의 배려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마틸다’는 그때야 비로소 에밀리 자매의 궁색한 살림살이를 탐색하는 대신 그들이 일군 꽃밭으로 눈길이 가게 되고, ‘나스타치움의 달콤한 향내’까지 느끼게 된다.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그들만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샬럿과 해리엇 두 자매는 그들 주위 온 둘레가 ‘빛 천지’임을 느낀다. 조금 힘겨울지라도 누군가의 아내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평온’과 ‘평안’을 지키는 이 여성들의 꿋꿋한 모습은 아주 인상 깊게 다가온다.


루이자 앨리스가 자기만의 권리를 팔아버렸거나 자기가 누리는 유일한 만족이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됐다면, 지금도 그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평온과 평안은 이제 그 자체로 루이자의 특권이 되어 있었다. 루이자는 하루하루가 묵주 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고 흠 없고 순수하게 오랫동안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루이자는 세속과 격리되지는 않았으나 수녀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며 기도하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뉴잉글랜드 수녀>, 96~97쪽)



요즘, 비혼 여성 숫자가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에서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혼자 사는 여성을 바라보는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기 참 어렵다. 루이자, 샬럿, 해리엇, 에밀리와 엘리자베스는 무려 100여 년 전 여성들이다. 그 시절 이렇게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 프리먼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썼을까. 그녀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그 시절 여성답게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그 시대 여느 여성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홀로 외롭더라도, 힘에 겨운 순간이 오더라도, 때로 주변 시선에 주눅이 들더라도,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프리먼은 어머니가 요구하는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평생 어머니의 방식에 저항했다고 한다. 그 시대의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니, 얼마나 멋진 여성인가. 《엄마의 반란》에는 그런 프리먼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작품 4편만으로는 부족하다.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두꺼운 책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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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모리 2020-10-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10-28 22:16   좋아요 0 | URL
넵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라는 수필이 있다. 중국의 주자청(주쯔칭)의 글인데, 담백하고 소박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뜻밖의 감동을 준다. 멀리 공부하러 떠나는 자식이 걱정되어 역까지 배웅 나온 아버지가 이것저것 챙겨주다가 귤을 사주려고 비대한 몸으로 철길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 정확히는 그 뒷모습이 자식의 눈으로 그려진다. 다 큰 자식은 주자청 본인이었을 텐데, 이것저것 챙겨주는 아버지의 보살핌이 부담스럽고 못마땅하던 아들은 그 뒷모습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허물어지고 만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수필은 꽤 인상 깊었다. 다른 것이 아닌 다 늙은 부모의 ‘뒷모습’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아버지의 뒷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를 인간으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대학 1학년 때였나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외박을 하고 밤 새워 술을 마시고는 첫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던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 6시를 조금 넘었을까. 아버지 또한 나를 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무단 외박에, 술이 덜 깬 몰골에, 다른 사람들은 새 아침을 시작하는 시간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집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게다가 하필이면 출근하는 아버지를 맞닥뜨렸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다녀오세요....’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일찍 오는구나.’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길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바쁜 아침이라 꾸중할 시간도 없었겠지만, 뜻밖의 덤덤한 아버지의 태도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혼이 나지 않아서 이상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밥벌이를 하러 나가는 한 중년 남자의 고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날 그 뒷모습만큼은 내 부모로서가 아닌, 고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또렷하게 남은 것을 보면, 인간의 뒷모습은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는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에서 ‘나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92쪽)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사진 속 사람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일이 드물다. 레이터 자체가 피사체를 향해 직접적인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는 주로 거울과 유리창에 비친 형상을 담거나 인물의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담거나, 유리창이라는 매개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피사체를 바라본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차갑거나 불안하지 않다. 길모퉁이의 세세한 풍경을, 삶을, 사람을 사울 레이터는 그만의 방식으로 느긋하게 읽어 나간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사진작가는 여기 또 한 사람 있다. 에두아르 부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그의 사진도 사람들의 뒷모습을 많이 포착하고 있다. <뒷모습>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런 사진들만 추려낸 것이라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50장이 넘는 이 빼어난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에두아르 부바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인간의 뒷모습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런 순간이나 피사체를 담고자 애써왔음을 절로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사진에 시(時)와 같은 글귀를 덧붙인 미셸 투르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뒷모습을 예찬한다.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한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 뒤쪽은 진실이다.’(<뒷모습>, 5쪽) 이 책은 50 여개의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을 통해 바로 그 등 뒤의 진실을 탐색한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부바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다정하게 속삭이고 또 때로는 웃음을 주며, 어느 땐 숭고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사진 하나하나에 덧붙인 미셸 투르니에의 글귀들은 더욱 감칠맛이 난다. 기도하느라 수그린 등을 보며 투르니에는 ‘신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랑보다 두려움이다. 신 앞에서 인간은 둥글게 등을 구부리고, 그 왜소함 속으로 빠져든다.’ 말하고, 패션쇼 의상 모델인 여자의 뒷모습을 포착한 사진에서는 옷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자기를 희생하고 완전한 헌신을 약속했기에 모질게 혹사당한 몸이 되었던 여자의 고통을 엿본다. 그리고 그 몸이 문득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제 존재와 매력을 회복하는 것을 여자의 뒷모습에서 포착한다.

바다에 텀벙 뛰어들지 못하고 주저하는 커플의 뒷모습을 보며 가난한 이들의 사랑을 떠올리기도 한다. 투르니에가 생각하기에 부자들은 그럴 때 망설임 없이 수영을 한다. ‘수영복 표면적은 그걸 가진 사람의 재산에 반비례’한다. 그래서 ‘아주 큰 부자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헤엄친다. 부자들은 수영도 할 줄 아니까.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부끄럼을 타고, 추위를 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첫날처럼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여자는 스커트를 걷어 올린 채.’ 에두아르 부바가 어떤 시선과 느낌으로 바다 앞에서 서성이는 남녀를 카메라에 담았을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이 해석에 왠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바와 투르니에의 시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허리를 구부리고 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에서 투르니에는 ‘할머니 그렇게 허리를 구부리고 가는 것은 땅바닥에 떨어뜨린 청춘을 찾으려는 건가요, 아니면 등을 짓누르는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인가요?’ 묻고, 친구와 다정히 어깨동무한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우정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정에는 사랑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정의와 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적 분위기에서 우정이 피어난다.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어서 타인들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을 통해서 그 구체적 본질’을 드러낸다. 한편, 바다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뒷모습 사진에서 투르니에는 그의 소설 <마왕>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죽은 고기 뭉치요 지방질 창고인 어른들의 엉덩이와 반대로 아이들의 활기찬 엉덩이는 언제나 깨어나 팔딱거리고 때로는 야위고 빈약해 보이지만 어느새 쾌활해져서 천진하게 낙천적, 얼굴처럼 표현적.(미셸 투르니에, <마왕>)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 뒷모습 사진에서 투르니에는 엉덩이를 찬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찬미해도 모자랄 것이 엉덩이다. 인간이 지닌 것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가득한, 발에 걷어차이고, 매를 맞아도 보잘것없는 몸 바침이 운명인, 그 모든 것이 찾아와 은신하는 이 두 쪽의 둥그런 물건을 만약 조물주께서 깜빡 잊고 남자 여자에게 달아주지 않았다고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에게 엉덩이가 없다면 정말 이상할 것 같기는 하다. 부바와 투르니에는 이렇게 독자가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하게 해주면서 인간의 뒷모습을 비롯해 조각상, 샹송과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파리의 뒷모습, 창턱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덩치 큰 고양이의 뒷모습 등등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아름다움과 때로는 그 빛과 그늘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부바가 투르니에의 글귀를 읽었다면 아마도, 오, 그게 바로 내 시선이었어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렇군요, 하고 동의와 찬탄을 보냈으리라. 그럴 만큼 사진가와 작가의 궁합은 찰떡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 모음인 <예찬>에도 부바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1974년 4월에 일본으로 함께 떠났는데, ‘일본 기행 수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그들이 함께 보고 느낀 일본 풍경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그 글에서도 투르니에는 부바를 예찬하는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쓰고 있다. ‘부바가 손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차의 흐린 불빛과 진동 속에서도 훌륭한 사진을 찍어낼 수 있을 만큼 실력자다.’(미셸 투르니에, <예찬>, 234쪽)

<뒷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과 글은 ‘잊혀진 천사’이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어른들. 그 덩치 큰 어른들 틈에서 천사 날개를 단 아이가 자기도 보려고 애를 쓴다. 회색 빛 어른들 사이에서 흰 날개를 지닌 이 아이의 뒷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그래서 정말 천사가 내려온 느낌을 자아낸다. 투르니에는 그 사진에 이렇게 덧붙인다. ‘저들 어른들은 대체 무얼 보고 있기에 저토록 심각한 것일까? 그 무슨 속된 구경거리에 저토록 절박하게 팔려 있기에 저들은 단 하나, 중요한 것을, 잊힌 채 무시당하고 뒷전이 된 이 어린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여러 번 어리석은 즐거움을 좇아 무작정 달리곤 하는가, 우리를 기다리는 천사가 등 뒤에 와 있는데.’





<뒷모습>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사진과 글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대부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앞만 보며 달리느라 뒤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남겨두고도 잊고 만다. 마치 등 뒤에 천사가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104쪽)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뒷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또는 그냥 지나친 뒷모습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주는 깨달음을 전하면서 바쁜 일상에 작은 쉼표를 찍어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잊혀진 천사’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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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1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너무 좋고요 잠자냥님, 올려주신 잊혀진 천사의 사진도 정말 좋네요.

잠자냥 2020-10-16 10:56   좋아요 1 | URL
언젠가 다락방 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ㅎㅎㅎㅎ (근데 안젤리나 졸리 뒷모습이였고.... 두둥!)

다락방 2020-10-16 11:05   좋아요 2 | URL
제가 이 글 진지해서 태클 걸려다 참았었는데요 사실 엉덩이 말입니다... 엉덩이요. 제 뒷모습은 엉덩이만 보일거에요. 아주 큽니다. 유전이에요.... 하아-

잠자냥 2020-10-16 11:4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셸 투르니에가 예찬할지도!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0-16 11:49   좋아요 0 | URL
앗 어떡해요, 조 아래 쿨캣 님이 사람의 외양을 엉덩이로 평가한다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16 11:52   좋아요 0 | URL
아 이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10-16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제 얘기인줄 알았습니다. ㅠ
뒷모습은 정직하다는 투르니에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저는 남녀 불문하고 사람의 외양을 뒷태 그 중에서도 엉덩이로 평가합니다. 얼굴 가슴 이런거 안보고 엉덩이가 멋지면 속으로 열광하는데요.투르니에가 엉덩이 찬미자라니! 좋아집니다.
아침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0-10-16 11:50   좋아요 1 | URL
하하하, 알고 보니 아버지와의 그런 에피소드 다들 하나쯤 있는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 그 아침에 정말 자기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지지 않던가요? ㅎㅎㅎㅎㅎ
쿨캣 님도 엉덩이 찬미자이군요! 투르니에와 쿨캣님이 열띠게 엉덩이 이야기하는 모습 상상해 보니 재미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0-10-16 11:58   좋아요 0 | URL
마누라가 제 엉덩이 탁 올라붙은 거 하나 보고 결혼했다더니, 그게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이 듭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10-16 12:26   좋아요 0 | URL
오 폴스타프 님 소싯적 엉덩이가 그랬다는 거군요! ㅋㅋㅋㅋㅋ 투르니에에게 묘사해 보라고 하고 싶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0-16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진짜로 궁금한 건, 김화영이 어떻게 후기를 썼을까, 하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이 양반이 저한테 찍혀도 좀 많이 찍힌 거 같네요. 유명한 불문학자니까 번역수준이야 뭐 최상이겠지만, 아 글쎄, 사람이 성의가 너무 없는 거 같아서리.... ㅋㅋㅋㅋㅋ 하긴 뭐 번역만 잘 하면 됐지 성의까지야....
그래서 트루니에를 좋아하지만 여태 이 책 사기를 주저했습지요.

잠자냥 2020-10-16 12:27   좋아요 0 | URL
크하하, 김화영 후기는 예전에 폴스타프 님이 예상하신 딱 그대로입니다. 정말 어쩜 그렇게 예상을 한치도 안 벗어나던지.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역자 후기는 걍 대충 읽고 넘겼어요. 뭔가 오글거림;;

coolcat329 2020-10-1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맞습니다! 정말 부끄러웠죠. 그 시절 생각하면 책 한 권도 안 읽고 돈쓰고 술먹고 토하고 ㅠㅜ 에휴 정말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시절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0-16 12:28   좋아요 0 | URL
ㅎㅎㅎ 한때 다 그런 시절이 있는 거죠. 제가 그 시절 술 먹고 토한 양만 따져도.... 음음. ㅋㅋㅋㅋㅋㅋ

hnine 2020-10-16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모습을 보고 있는사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글이 좋아 아까 읽고 지금 다시 한번 읽고 갑니다.
아버님과의 일화는 제 마음도 흔들어놓아요.

잠자냥 2020-10-16 21:32   좋아요 0 | URL
와 두 번이나 읽어주시다니, 더없는 기쁨입니다. 감사합니다.

noomy 2020-10-27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넘 좋아요~ 좋아요 두 번 안되나요? ^^;;

잠자냥 2020-10-27 10:26   좋아요 0 | URL
과찬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