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만으로도 모든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뉴잉글랜드 수녀>를 쓴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이 그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영미 여성 작가 단편모음집인《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올해 처음 읽었다. 그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작품 이야기는 이미 한 차례 리뷰에서 쓴 적이 있어서 이곳에서 또 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일상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 대신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고 홀로 꿋꿋하게 살아갈 인생을 스스로 택한, ‘루이자’라는 캐릭터는 좀처럼 잊기 어렵다. 그 작품에 반해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을 알라딘에서 검색해봤는데, 몇몇 책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대부분 여러 작가와 함께 실린 단편 모음집이 전부이다. 그러던 참에 이렇게 그만의 단편을 모은 《엄마의 반란》이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엄마의 반란>은 제목 그대로 엄마의 ‘반란’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보 저 사람들이 뜰을 왜 파는 거예요?” 어느 농가에서 일꾼들이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중이다. 중년 여인 ‘사라’는 남편에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왜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집 뜰을 파는지 남편에게 여러 차례 묻지만, 남편은 뚱한 표정만 지을 뿐 별 대답이 없다. 남편처럼 무뚝뚝한 아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겨우 진상을 알 수 있다. 남편은 ‘또’ 창고를 만들고 있다. 사라와 딸 ‘내니’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사는 집은 다 낡아서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집을 다시 짓거나 수리하기는커녕, 가축우리를 새로 만들거나 창고 짓는 일에만 골몰한다. 곧 결혼을 앞둔 딸은 엄마보다 더 불만인 것 같다. 이런 집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도 없고, 손님을 초대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하는 딸에게 사라는 불평하지 말라며 그 시절 엄마들이 할 만한 잔소리만 늘어놓는다.


“우리 여자들이 그저 아이나 받아내는 사람들이란 걸 모르니? 남자들을 볼 만큼 봤잖니. 요새 하는 짓 봐, 남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그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하지. 날씨를 신의 섭리로 여기고 불평하지 않듯 우린 남자들이 하는 짓에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해.”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조지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내니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곧 울 것처럼 입술을 씰룩댔다.
“두고 봐라, 조지 이스트만이라고 다를 성싶니? 아무튼 아버지를 판단하려 하면 안 돼. 뭐 어쩌게니,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온걸. 그리고 결국 우리도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잖니.” (《엄마의 반란》, 13쪽)


사라는 못을 박듯이 한 번 더 딸을 다그친다. “불평하지 마. 나도 여태 불평 한 번 안 해봤어.” 이런 상황만 봤을 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옛 시절 이야기이려니 싶어진다. 남편에게 깍듯이 존대하는 부인, 그에 비해 아내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자기 멋대로 집안일 결정을 하면서 대꾸도 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똑 닮아서 벌써 싹수가 노란 아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으니 찍소리 말고 살라고 이야기하는 순종적이고 답답한 엄마, 그런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신랑감인 ‘조지’는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왠지 불안한 딸……. 이런 가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체 이런 집구석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까 기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프리먼이 이야기를 그렇게 쓸 리가 없다. 제목 또한 ‘엄마의 반란’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사라는 이대로 참을 수 없다. 서서히 ‘반란’을 꾀하기 시작한다. 딸에게는 아버지를 판단하지 말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라는 듯 말했으나, 사라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성싶다. 일단 남편을 붙들고 이야기해 보기 시작한다. 물론 남편은 사라가 뭐라고 말하든 예의 그 무시하는 듯한, 너는 떠들어라 난 내 갈길 가련다, 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이 남자를 지켜보노라면 등짝을 한 대 갈겨주고 싶어진다. 그래도 사라가 참지 않고 할 말은 하니까 조금 속이 풀린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당신은 굳게 약속했죠. 그해가 끝나기 전에 새 집을 지어주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 당신은 계속 돈을 벌고 있고,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저축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창고를 짓고, 우사와 새 헛간을 짓더니 이제 또 창고를 하나 더 짓는다고요? 여보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혈육보다 가축들한테 집 지어주는 게 더 중요한가요?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요?” (《엄마의 반란》, 20쪽)


이렇게 소리쳐도 못들은 척 하는 남편이니, 극약 처방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사라는 드디어 뭔가를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자신이 없어질까 봐 생각나는 대로 문구를 하나 만들어서 마음에 되새기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27쪽). 그리고 사라는 ‘반란’에 성공한다. 조용한 마을에서 일상을 훌쩍 벗어난 이 일은 마을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여자들은 서로의 집에 들러 이 일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다. 모두가 일손을 멈춘 채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사라를 평하느라 바쁘다. 어떤 사람은 사라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규칙을 무시하고 반항만 일삼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헐뜯는다. 마을 목사까지 사라를 찾아와 충고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라에게 한방 먹고 터덜터덜 돌아선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통쾌하다. 사라의 반란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엄마의 반란》에 실린 네 작품은 거의 이렇게 일상의 작은 ‘반란’을 통해 주인공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쟁취하거나 마침내 이룬다. 그리고 대부분은 엄마인 ‘사라’를 제외하고는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갈라 드레스>의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두 중년 자매, <뉴잉글랜드 수녀>의 ‘루이자’, <빗나간 선행>의 두 노파 ‘샬럿’과 ‘해리엇’ 등 모두가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또는 둘이 살아가며 그 삶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가난하고, 늙고 쇠약해져서 겨우 삶을 유지해 나가더라도 자신들만의 공간과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홀로 잔잔하고 평화로운 하늘 아래 부드럽게 펼쳐진 새로운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길은 너무 곧고 한결 같아서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으며 ‘또한 너무 좁아서 옆에 누군가와 함께 걸을 공간이 없’(<뉴잉글랜드 수녀>, 80쪽)는 그런 삶이다. 그러한 삶이 연인, 또는 이웃 등 타인들로 인해 파괴되는 일을 그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안온한 일상이 파괴될 것 같으면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채 당당히 홀로 맞서 자기 삶을 지킨다(<뉴잉글랜드 수녀>). 또 누군가의 선행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단연코 그 선행을 거부하고 자기 삶을 지키고자 나약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용기를 발휘하거나(<빗나간 선행>), 나름의 재치를 발휘해 품위를 지켜나가고, 뜻하지 않은 선물이 주어져 삶이 조금 여유로워졌을 때는 그것을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여성에게 베푸는 아량을 보이기도 한다(<갈라 드레스>). <갈라 드레스>는 여성간의 연대도 엿보이는데,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자매의 배려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마틸다’는 그때야 비로소 에밀리 자매의 궁색한 살림살이를 탐색하는 대신 그들이 일군 꽃밭으로 눈길이 가게 되고, ‘나스타치움의 달콤한 향내’까지 느끼게 된다.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그들만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샬럿과 해리엇 두 자매는 그들 주위 온 둘레가 ‘빛 천지’임을 느낀다. 조금 힘겨울지라도 누군가의 아내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평온’과 ‘평안’을 지키는 이 여성들의 꿋꿋한 모습은 아주 인상 깊게 다가온다.


루이자 앨리스가 자기만의 권리를 팔아버렸거나 자기가 누리는 유일한 만족이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됐다면, 지금도 그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평온과 평안은 이제 그 자체로 루이자의 특권이 되어 있었다. 루이자는 하루하루가 묵주 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고 흠 없고 순수하게 오랫동안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루이자는 세속과 격리되지는 않았으나 수녀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며 기도하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뉴잉글랜드 수녀>, 96~97쪽)



요즘, 비혼 여성 숫자가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에서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혼자 사는 여성을 바라보는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기 참 어렵다. 루이자, 샬럿, 해리엇, 에밀리와 엘리자베스는 무려 100여 년 전 여성들이다. 그 시절 이렇게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 프리먼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썼을까. 그녀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그 시절 여성답게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그 시대 여느 여성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홀로 외롭더라도, 힘에 겨운 순간이 오더라도, 때로 주변 시선에 주눅이 들더라도,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프리먼은 어머니가 요구하는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평생 어머니의 방식에 저항했다고 한다. 그 시대의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니, 얼마나 멋진 여성인가. 《엄마의 반란》에는 그런 프리먼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작품 4편만으로는 부족하다.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두꺼운 책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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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모리 2020-10-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10-28 22:16   좋아요 0 | URL
넵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