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의 일이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 내내 또렷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말 리어카’라는 것이 있었다. 아저씨가 말이 매달린 리어카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코흘리개들한테 100원씩 받고 10분 정도 말을 태워주는 그런 거였다. 요즘 이 말 리어카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옛 시절을 그리는 장면 속에 추억처럼 등장하고는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 리어카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나는 이 말 타기를 좋아해서 동네에 말 리어카가 오면 신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생 정도만 되도 덩치가 커져서 이 말은 작게 느껴진다. 때문에 초등학생이 이 말을 타는 것은 어쩐지 좀 우스워진다. 나 또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만 말을 탔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동생들이 말을 탈 때면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런 오후 중 하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말 리어카를 봤다. 아홉 살 즈음이었다. 그 말 리어카에는 풍선, 정확히 말하자면 비치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타다가 손으로 그 풍선을 툭툭 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그 풍선을 툭 쳤다. 리어카 앞을 지나가다가 위에 매달린 풍선들을 하나씩 툭툭툭 친 것이다. 말을 타지 못해서 심술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장난이었을까.

그런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말 리어카 아저씨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들더니 나에게 던지려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쩐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못하던 나였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쯤 위협하다 말겠지 했던 아저씨는 계속 돌을 들고 쫓아왔다. 나도 내리 달렸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한테 풍선 좀 쳤다고 저 큰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선을 친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죽기 살기로 달렸더니 어느 순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도 집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뒤로 더 이상 그 리어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말 리어카가 보이면 멀찍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그즈음에야 그 아저씨가 그토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정신지체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가 보통 어른들과는 달리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공포는 또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 돌덩어리를 내게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묘하게도 어린 시절 말 리어카 아저씨와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툭툭 쳐댔던 풍선. 순간 몹시 화가 난,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의 난폭한 행동. 이런 작은 우연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와 그 순간 정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을까? 그리고 또한 그 아저씨의 인생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돌덩어리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삶에는 이렇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 아니 조금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로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어찌 알았으랴. 아이로서 자기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고 싶었던, 마음대로 뭐든 결정해 버리는 부모님에게 작은 복수 또는 반기를 들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이야. 더욱이 자기 삶만 바뀐 게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삶이 다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삶의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레이프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레이프처럼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길을 잃고 스스로를 유폐하는 형벌을 내린다. 어디 루시만 그러할까. 그녀의 부모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한 ‘그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어둡고 쓸쓸한 길에도 과연 빛은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루시 골트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