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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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재미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정말 단숨에 읽었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을 다시 읽는 날이 올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완전히 반하게 될 줄이야.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어릴 때 읽은 <작은 아씨들>은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내가 워낙 ‘소녀’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왕자와 거지>나 <보물섬> 또는 <15소년 표류기>같은 소년들의 모험담을 좋아했다.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이라면 으레 좋아하는 <빨강 머리 앤>도 <소공녀>도 <작은 아씨들>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세계가 집 안에 ‘갇힌’ 소녀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에서 인상 깊은 인물은 있었다. 바로 둘째 조. 조는 <작은 아씨들>의 딸 넷 가운데 가장 소년스럽고 활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나는 조를 좋아했다. 그런 조가 어른이 되어 작가가 되었을 때도 그 설정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조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나 또한 딸 넷 가운데 둘째이며, ‘조’에 어울리는 특성들을 내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가 된 조의 모습도 왠지 뿌듯했다.

 <작은 아씨들>의 ‘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까닭은 루이자 메이 올콧이 바로 그 ‘조’의 모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올콧을 연구한 이들은 다분히 ‘조’가 그녀의 분신이며 그렇기에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선정소설(Sensation Novel) 원고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는 장면에 주목했다. 심지어 ‘조’는 나중에 그 선정소설들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써서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소설이 바로 올콧의 <작은 아씨들>에 해당하며 그렇다면 조가 썼다는 선정소설처럼 올콧도 실제로 그런 소설들을 여기저기에 투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녀의 ‘선정소설’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빙고! 알고 보니 올콧은 ‘A.M. 버나드’라는 가명 또는 익명으로 다수의 선정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사실에 고무되어 그녀의 숨겨진 작품들을 발굴하는데 몰두하고 그렇게 해서 1970년대에 나온 선집이 <가면 뒤에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숨겨진 스릴러들>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성주의 문학연구가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가면 뒤에서>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들을 보면 직접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에는 올콧의 작품이 이 시리즈에 있는 게 조금 의아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조르주 페렉이나 안토니오 타부키, 제발트 등의 책은 여러 권 갖고 있고 또 좋아하기도 한다. 그밖에 다른 작가들 책도 더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올콧의 작품은 관심 밖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리즈에 그녀의 작품이 왜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런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된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골치 아픈 이야기라고 짐작다면 큰 오산이다. <가면 뒤에서>는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재미와 흥미에서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나는 올해 여러 권의 재미난 책을 읽었지만 이토록 흥미진진한 책은 없었다. 스티븐 킹의 <그것>도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이 책만큼 흥미롭고 쫄깃쫄깃하지는 않다. 일단 그 두 작품들은 꽤 긴 분량을 자랑하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좀 늘어진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런데 올콧의 <가면 뒤에서>에 실린 이야기들은 중편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을 비롯하여 나머지 단편 ‘어둠 속의 속삭임’, ‘수수께끼’, ‘위험한 놀이’ 4편 모두 짧고 굵직하다. 지루할 틈이 없다. 늘어지기는커녕 숨 막힐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오랜만이다.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으로 다시 불을 당겨보는 건 어떨까? 분명히, 다음 쪽이 궁금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올콧, 이 여자 정말 이야기꾼일세. 이런 생각들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작품들만을 쓰고 죽었다면 정말 억울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올콧의 이 책 제목이 <가면 뒤에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어쩌면 착한 딸의 가면을 쓰고(올콧의 아버지는 저명한 초월주의 사상가이자 사회 개혁자로서 올콧에게 인내와 절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을 삼아왔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아래서 얼마나 절제하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금욕적으로 자랐을지는 쉽사리 상상이 가능하다) <작은 아씨들>과 같은 작품을 썼겠지만 사실 그 내면에서는 불타오르는 열정과 투지(!)가 들끓었고, 그리하여 이런 작품들을 써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흥미로운데 올콧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주의자로 평생 숙원이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고 한다. 올콧은 어머니의 이런 영향으로 각종 정치활동에 활발히 참여했고 여성운동과 노예해방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저런 영향 속에서 <작은 아씨들>과 같은 교훈적인 작품과 <가면 뒤에서>와 같은 ‘펄프픽션’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급진적인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줄거리를 소개하면 읽는 재미가 크게 반감될 터이기에 세세하게 소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책에 실린 작품 속 여성들은 19세기 당시로서는 드물게 매우 능동적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짜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역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도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자 애쓴다(‘가면 뒤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의 애정 또한 스스로 쟁취하려고 한다. 돈이나 재산으로 쉽게 그 상대를 얻을 수 있는데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어둠 속의 속삭임’). 더더군다나 놀라운 점은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가 등장해 자기 앞에 주어진 난관들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한다(‘수수께끼’).

 ‘가면 뒤에서’의 ‘진 뮤어’를 악녀라고 하지만 정말 ‘그들’의 평가대로 악녀일까? 가정교사라는 낮은 신분의 여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그런 경멸이 마땅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그 잘나신 귀족 집안 자제들에게 자기로서는 최대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발악은 아니었을까? 진 뮤어가 세상의 잣대로는 ‘악녀’라고 할지언정 그녀가 펼치는 게임에서 부디, 제발 이기기를,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그녀의 복수는 19세기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그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가면 뒤에서>를 통해 그저 <작은 아씨들>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 무척 즐겁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올콧 선집 2권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이미 알고 있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 어쩌면 착한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졌던 진짜 ‘얼굴’을 알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작품 자체로도 무척 흥미진진했던 <가면 뒤에서>는 독서의 즐거움을 여러 가지로 느끼게 해준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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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tamani 2017-10-3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소식이군요

잠자냥 2017-10-30 14:09   좋아요 0 | URL
재미난 책이니 언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ㅎㅎ

cyrus 2017-10-3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콧의 작품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어보면 재미있겠어요. ^^

잠자냥 2017-10-30 14:2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구구절절 분석해보고도 싶었지만.... 다른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위해 여기까지만! ㅎㅎ

케이 2017-10-3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책읽는 재미가 없어서 통 안읽히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7-10-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 이 책은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처럼 잃어버린 독서에 대한 흥미를 꼭 되찾게 해줄 거예요. ㅋㅋㅋ 아니,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 만큼은 정말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