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 Dubliners>은 그의 난해한(?) 문학세계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컸다. 15개의 단편이 모두 갑자기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주인공과 각 인물들의 관계는 무엇인지 도통 감 잡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15편의
단편은 말 그대로 ‘더블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의 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자도 모두 다르다. 화자에
따라 이야기의 느낌도 달라진다. 때문에 초반에는 ‘역시 난해한 것인가?!’하는 느낌도 있고 조금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재미있자고 보는 책, 왠지 읽어야 할 작가니까, 의무감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태도는 내 가치관(?)과도 맞지
않잖아?’하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미련 없이 확 내려놓지는 못하고….
그러다 몇 편의 단편을 넘기니
서서히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몇몇 단편은 꽤 마음에 들었고, 책을 덮을 때쯤엔 ‘와, 잘 썼다’하는 탄성이 나왔다.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종교적으로는 부패했고, 경제는 궁핍하고, 가정은 화목하지 않다. 꿈은 좌절되기
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있거나 탈출할 기회가 주어져도 용기가 없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다. 종교
못지않게 정치도 부패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알코올에 취해있다. <더블린 사람들> 15편의 삶은 모두 그렇다. 무기력감이
팽배하다. 언젠가 보았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컷>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블린
사람들>처럼 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은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조금은(?) 불친절한 구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어떤 사연이 있는데, 그 사연 때문에 이러저러하다고 ‘작가’가
개입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철저히 뒤로 숨어 있다. 카메라가 이 집을 비추다가 갑자기 다른 집을 비추듯이 그저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가 비춘 그 시점부터 카메라가 또 다른 집을 비추기 전까지의 상황만으로 독자는 그 앞뒤전후를 파악해야
한다. 때문에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끼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그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퍼즐을 푸는 기분이랄까.
단편을 읽어감으로써 당시의 아일랜드와 더블린의 상황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기
때문에 읽는 게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작가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그 무렵 시대 상황이나 종교, 정치의 부패, 사회의
타락 등을 유추해갈 수 있도록 짜놓은 구조와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묘사가 돋보인다. 게다가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한다.
“아이고 망측해라, 저 추잡한 짓을 하는 노인 좀 봐”라는 구절은 나오지만 ‘추잡한 짓’이 끝내 뭐였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한 없이 열려있고, 작가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고, 독자는 읽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런 매력
때문일까,<더블린 사람들>은 왠지 한 번은 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빌려
읽었는데, 각주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서 흐름이 많이 끊겼다. 다시 읽어볼 때는 다른 버전으로 읽어봐야지. 제임스 조이스 한
단계를 넘었으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까지는 읽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