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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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스탄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정확히는 터키 곳곳이었다. 한 달에서 며칠 모자라는 시간. 어찌 보면 길지만 막상 그곳에서는 짧게만 느껴지던 그 기간 동안 오로지 터키만을 여행했다. 이스탄불은 여행이 시작된 도시이자 마지막으로 들른 도시였다. 그때 만났던 터키의 모든 도시들이 아름다웠지만, 이스탄불이 던져준 매력은 그 어떤 도시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 여행은 내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고 그 까닭은 거의 이스탄불 때문이다. 내게 터키는 곧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독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한다는 그 흔한, 수없이 들었던 말을 직접 체험하니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다채로운 인종에 자유로운 사람들, 꿈틀거리던 생의 기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도시. 단 며칠 동안 머물렀음에도 홀딱 반해버린 그곳- 이스탄불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읽는 일은 이스탄불을, 터키를 추억하는 일과 같다. 터키를 다녀온 뒤로 파묵의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때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도시 곳곳을 떠올리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내게 가장 좋은 책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어쩌면 그 자리를 <내 마음의 낯섦>에게 살짝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한 편은 에세이로, 또 다른 한 편은 소설로 이스탄불이라는 놀라운 도시를 그려내고 있으니, 그냥 나란히 둘까?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을 펼쳐서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나는 그해 여름 곳곳을 누비던 이스탄불을 떠올렸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탁심 거리 등등. 터키에 다시 가고 싶었던 소망이 얼마쯤은 이뤄진 것도 같았다. <내 마음의 낯섦>의 주인공은 바로 ‘이스탄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메블루트’라는 가난하고 정직하지만 소심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메블루트 못지않게, 이 작품의 숨은 주인공은 신비롭고 열정적인 도시 ‘이스탄불’임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라크를 홀짝이고 아이란을 마시며, 되네르 케밥과 시쉬 케밥을 먹고…. 이런 기억들이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했던 도시 이스탄불과 함께 되살아난다. 메블루트의 이스탄불은 어쩌면 내가 찾았던 이스탄불과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메블루트는 1969년 늦여름에 이스탄불로 이주해 2012년, 이스탄불의 도시화가 거의 완성되는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살아간다. 내가 이스탄불을 찾았던 해는 2011년이니 메블루트에게는 낯설기 만한 현대화된 이스탄불을 만난 셈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오자아!’를 외치는 메블루트를 스쳐지나갔던 것은 아닐까?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긴 내가 거닐던 곳들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였음이 틀림없을 테니 메블루트, 또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스만 스타일, 유럽 스타일 노래를 부르던 유흥 장소들은 폐쇄되고, 그 자리에 시쉬 케밥과 아다나 케밥을 먹고 라크를 마시는 시끄러운 식당들이 생겨났다. 배를 튕기면서 춤을 추며 즐기는 젊은이들은 보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메블루트는 이스틱랄 대로 근처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36쪽)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버지와 함께 무작정 이스탄불로 온 열두 살 소년 메블루트. 아버지와 아들은 1960년대 후반 이스탄불 골목 곳곳을 누비며 터키전통음료인 요구르트와 보자를 팔지만 가난을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터키를 구제하는 것은 밥장수, 행상, 되네르 케밥 장수들이 아니라 학문이다.”(96쪽) 라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로 가난을 벗어나보고자 하지만 학문에도 그다지 소질은 없다. 아니, 먹고 살기 바쁜 그에게 공부는 어쩌면 처음부터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사촌형의 결혼식장에서 반한 소녀에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3년 동안 줄기차게 연애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납치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결혼은 정말 성공일까? <내 마음의 낯섦>은 메블루트라는 평범한 남자와 그의 대가족, 그리고 그들의 삶을 중심으로 1960년대 끝 무렵부터 2012년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이스탄불의 변화와 발전, 더 나아가 터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내 마음의 낯섦>속 그들의 삶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이스탄불의 도시화와 그 도시화로 말미암은 빈민들 삶의 모습이 이 땅, 즉 서울의 도시화와 그 안에서 살아간 수많은 소시민들의 삶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터키전통음료인 ‘보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목 곳곳을 누비며 생계를 이어나간 메블루트의 모습에서 어느 추운 겨울밤 골목에서 들리던 ‘찹쌀떡 사려~’를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도시는 현대화가 되어 고층빌딩이 늘어서고 생활 시설이 편리해지고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수많은 평범한 ‘메블루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아지거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미로와도 같은 이스탄불 골목처럼 헤매게 된다. 그래도 메블루트는 그 하루를 날마다 성실히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기에.


그럼에도 문득 어떤 날은 말 못할 정도로 낯선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십년이 넘도록 이스탄불에서 살아도 어떤 때에는 이 도시가, 자기의 삶이 낯설기만 한 것이다. ‘처음 삼십오 년은 매년 해를 더할수록 도시에 대한 예속감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탄불이 생소해졌다. 막을 수 없는 홍수처럼 도시에 밀려드는 수백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새로운 집들, 고층 건물들, 쇼핑센터들 때문일까? (623쪽)’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영원한 이방인처럼 ‘마음의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런 이스탄불을 떠나면 그는 또 그 도시를 그리워한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이 ‘쓸데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고향에는 더 이상 ‘밥벌이가 없었고’, 그곳에서 그는 ‘그저 손님일 뿐’이었다. 그는 ‘이스탄불로 돌아오고 싶었다. 메블루트의 삶, 분노, 행복, 라이하 그 모든 것들이 이스탄불에 있었’(483쪽)기 때문이다.


어디 메블루트만 그러할까, 세계 곳곳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간다. 나 또한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이곳을 떠난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동네는 조금씩 바뀔지언정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를 떠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서울도 눈부시게 변화했다. 오늘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내가 어릴 적 뛰놀던 동네나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동네들은 문득 지나다 보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보다도 더한 고층건물들이 늘어섰다. 때로는 이 소란스러움과 혼잡함, 번잡함, 화려함이 싫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의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있을까? 나의 현재까지의 모든 삶이 서울이라는 도시 곳곳, 골목골목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한 이스탄불처럼 말이다.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태어나고 숨 쉬고 먹고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픔과 고통을 겪고 등등 모든 일을 함께한 그 도시와 이뤄지고 있음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랑’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단순하지만 변함없는 이러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사람은 주인공 메블루트도 아닌, 어느 평범한 이스탄불 여인이다.


“저 천 만 명의 사람들을 이스탄불에 불러들인 것은 생계이고, 이득이고, 고지서이고, 이자라는 것을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이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사람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453쪽)


메블루트는 큰 부를 얻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어떤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기나긴 인생을 지켜보노라면 이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일구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는 어떤 숭고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 마음속이 왠지 낯설어. 이 세상에 도무지 나 혼자인 것 같아.” 말하는 메블루트. 삶에서 문득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 고독감, 상실감과 같은 ‘낯섦’ 앞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다시는 그런 생각 들지 않을 거야.”(262쪽). 


비록 그의 사랑은 얼굴도 모른 채 시작되어 어떤 ‘혼동’과 ‘혼란’을 겪고, 그의 인생 또한 때로는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 끝없이 마음속에 ‘낯선 느낌’을 불러오지만, 그는 주어진 인생을, 사랑을 진실하게 살아간다. 그 평범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애쓴 그의 삶은 ‘이스탄불’과 언제나 함께였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이라는 혼동과 변화의 도시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바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의 낯섦조차도 모두 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


언젠가는 터키에 한 번 더 가볼 생각이다. 이스탄불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꼭 보자 맛을 봐야지. 운이 정말 좋아서 이스탄불 어느 골목에서 메블루트를 닮은 이에게 보자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다면, 그가 외치는 ‘보오자아!’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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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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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그 사람은 나를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아침마다 보지만 그에게 나는 그 앞을 날마다 지나치는 수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그 점포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던가? 아, 단 한 번, 정말 목이 말랐던 어느 날 생수 한 병을 산 게 고작이었다. 그 사람은 매우 비대한 몸집으로 작은 상자와도 같은 그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다. 비대한 몸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 검고 커다란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종일 지하철 가판대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답답하지는 않을까 공기도 나쁠 텐데, 숨 막히지는 않을까. 미래가 있을까.....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부디 그 작은 상자 속에 다시 갇히는 일이 없기를, 어디론가 조금은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갔기를. 그녀뿐만이 아니다. 집 전철역 근처에는 신문 가판대와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 아침부터 구두를 고치는 구두수선공도 볼 수 있다. 한 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종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람은 어떤 풍경, 어떤 모습일까.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을 읽노라니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담배 가게 소년>에는 그들처럼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배운 소년이 있다. 그의이름은 프란츠 후헬. 엄마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던 프란츠는 엄마의 부유한 애인의 죽음과 함께 도시로 나아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이 빈의 한 담배 가게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고향을 떠나 대도시 빈에 첫발을 내딛은 프란츠는 악취와 소음 속에 어지럽기만 하다.



“젊은이 어디가 안 좋아요?”
“아니에요.” 프란츠가 얼른 대답했다. “그냥 이 도시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요. 악취도 조금 나고요. 아마 배수로에서 나는 거겠죠.”
 “악취가 나는 곳은 배수로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세월이에요. 말하자면 부패한 세월이죠. 부패하고 타락하고 황폐해진 세월!”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 20쪽)


어쩔 수 없다. 도시에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살아가야 하므로. 담배 가게 주인 오토 트르스니에크는 프란츠에게 이런저런 일을 가르치면서 한 가지 특별한 임무를 준다. 모든 신문을 샅샅이 볼 것. ‘올바른 신문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담배 가게 단골들은 가게 주인에게 온갖 적절한 조언과 정보를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게 오토의 주장이다.

이렇게 담배 가게에서 프란츠는 신문을 읽고 담배와 신문을 사러 오는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성장한다. 프란츠가 세상을 배우는 수단이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였다면 현실성은 조금 떨어질 것이다. 신문도 신문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빈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담배 가게 손님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10대 소년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도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평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조금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담배 가게 손님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의 등장에 프란츠도 놀랐겠지만 나 또한 어라? 하면서 자세를 고쳐잡고 읽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소설이 조금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궁금해진다. 오로지 픽션이라면 좀 싱거울 것 같다(이 책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프란츠는 이 특별한 손님에게 즉각 매료당하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과 달리 세상에 찌들지 않은 프란츠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 아네스카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프란츠는 프로이트 박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로부터도 뾰족한 답은 얻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조언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담배 가게 소년>은 이렇게 프란츠와 프로이트의 색다른 우정, 프란츠와 아네스카의 사랑, 프란츠와 오토가 운영하는 담배 가게라는 작은 세상을 둘러싸고 서서히 광폭해지는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 등 그즈음 격변하는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또 광포한 시대를 살아가고 견뎌내는 온갖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 세태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란츠가 뭐랄까 좀 평면적인 인물 유형이라 주인공에게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착하고 순수한 소년이랄까. 어떤 순간에는 좀 뒤틀리기도 하고 내적 갈등도 과하게 겪었다면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네스카에게 그런 면모를 살짝 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곧 가라앉는다. 아직 미성년인, 덜 갖춰진 예민한 성정의 10대 소년이라면 좀 더 난폭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들, 아니 엄마와 주고받는 편지들도 ‘지나치게 착하고 아름답기만’하니까 어쩐지 낯간지러워지기도 한다.

아네스카에 대한 묘사도 물론 프란츠의 눈으로 그렸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해 보인다. 매우 쉽게 사랑을 주고 또 다른 남자에게로 쉽게 날아가는 보헤미안 여자. 어찌 보면 그저 전형적인 ‘나쁜 여자’ 정도로만 그려진 점도 아쉬웠다. 프란츠의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 느낌이랄까. 프란츠도 아네스카도 조금 더 입체적 인물로 그려졌다면 그들의 삶과 고민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안타깝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이 작품에 그려지듯이 이토록 좋은 사람일까? 이런 의구심도 든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난 왠지 프로이트가 인간으로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러나 구스타프 융 등 그의 제자들과 있었던 이런저런 일화를 보면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척 성마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한낱 시골뜨기 소년 프란츠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따스(?)하게 나온다니 살짝 괴리감이 들었다. 차라리 괴팍한 면이 더 두드러졌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인물의 성격 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마 결말은 좀 예상 밖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담배 가게 유리창 한쪽에 자신이 꿈꾼 내용을 적어 붙였던 프란츠. ‘제라늄이 밤에 밝게 빛난다. 하지만 그건 불이다. 어쨌든 늘 춤을 출 것이다. 빛이 사’ (267쪽) 라는 메모처럼 어두운 현실에서도 희망이 존재함을 이 작품은 조용히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제탈러의 작품을 읽은 것은 <담배 가게 소년>이 처음이다. 기대만큼 썩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한평생>까지는 읽어볼 계획으로 책을 사두었다. <한평생>은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한평생>이 로베르트 제탈러의 대표작인 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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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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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일이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 내내 또렷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말 리어카’라는 것이 있었다. 아저씨가 말이 매달린 리어카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코흘리개들한테 100원씩 받고 10분 정도 말을 태워주는 그런 거였다. 요즘 이 말 리어카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옛 시절을 그리는 장면 속에 추억처럼 등장하고는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 리어카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나는 이 말 타기를 좋아해서 동네에 말 리어카가 오면 신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생 정도만 되도 덩치가 커져서 이 말은 작게 느껴진다. 때문에 초등학생이 이 말을 타는 것은 어쩐지 좀 우스워진다. 나 또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만 말을 탔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동생들이 말을 탈 때면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런 오후 중 하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말 리어카를 봤다. 아홉 살 즈음이었다. 그 말 리어카에는 풍선, 정확히 말하자면 비치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타다가 손으로 그 풍선을 툭툭 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그 풍선을 툭 쳤다. 리어카 앞을 지나가다가 위에 매달린 풍선들을 하나씩 툭툭툭 친 것이다. 말을 타지 못해서 심술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장난이었을까.

그런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말 리어카 아저씨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들더니 나에게 던지려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쩐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못하던 나였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쯤 위협하다 말겠지 했던 아저씨는 계속 돌을 들고 쫓아왔다. 나도 내리 달렸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한테 풍선 좀 쳤다고 저 큰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선을 친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죽기 살기로 달렸더니 어느 순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도 집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뒤로 더 이상 그 리어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말 리어카가 보이면 멀찍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그즈음에야 그 아저씨가 그토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정신지체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가 보통 어른들과는 달리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공포는 또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 돌덩어리를 내게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묘하게도 어린 시절 말 리어카 아저씨와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툭툭 쳐댔던 풍선. 순간 몹시 화가 난,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의 난폭한 행동. 이런 작은 우연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와 그 순간 정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을까? 그리고 또한 그 아저씨의 인생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돌덩어리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삶에는 이렇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 아니 조금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로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어찌 알았으랴. 아이로서 자기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고 싶었던, 마음대로 뭐든 결정해 버리는 부모님에게 작은 복수 또는 반기를 들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이야. 더욱이 자기 삶만 바뀐 게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삶이 다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삶의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레이프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레이프처럼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길을 잃고 스스로를 유폐하는 형벌을 내린다. 어디 루시만 그러할까. 그녀의 부모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한 ‘그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어둡고 쓸쓸한 길에도 과연 빛은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루시 골트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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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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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 Dubliners>은 그의 난해한(?) 문학세계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컸다. 15개의 단편이 모두 갑자기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주인공과 각 인물들의 관계는 무엇인지 도통 감 잡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15편의 단편은 말 그대로 ‘더블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의 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자도 모두 다르다. 화자에 따라 이야기의 느낌도 달라진다. 때문에 초반에는 ‘역시 난해한 것인가?!’하는 느낌도 있고 조금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재미있자고 보는 책, 왠지 읽어야 할 작가니까, 의무감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태도는 내 가치관(?)과도 맞지 않잖아?’하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미련 없이 확 내려놓지는 못하고….


그러다 몇 편의 단편을 넘기니 서서히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몇몇 단편은 꽤 마음에 들었고, 책을 덮을 때쯤엔 ‘와, 잘 썼다’하는 탄성이 나왔다.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종교적으로는 부패했고, 경제는 궁핍하고, 가정은 화목하지 않다. 꿈은 좌절되기 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있거나 탈출할 기회가 주어져도 용기가 없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다. 종교 못지않게 정치도 부패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알코올에 취해있다. <더블린 사람들> 15편의 삶은 모두 그렇다. 무기력감이 팽배하다. 언젠가 보았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컷>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블린 사람들>처럼 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은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조금은(?) 불친절한 구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어떤 사연이 있는데, 그 사연 때문에 이러저러하다고 ‘작가’가 개입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철저히 뒤로 숨어 있다. 카메라가 이 집을 비추다가 갑자기 다른 집을 비추듯이 그저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가 비춘 그 시점부터 카메라가 또 다른 집을 비추기 전까지의 상황만으로 독자는 그 앞뒤전후를 파악해야 한다. 때문에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끼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그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퍼즐을 푸는 기분이랄까.

단편을 읽어감으로써 당시의 아일랜드와 더블린의 상황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기 때문에 읽는 게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작가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그 무렵 시대 상황이나 종교, 정치의 부패, 사회의 타락 등을 유추해갈 수 있도록 짜놓은 구조와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묘사가 돋보인다. 게다가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한다. “아이고 망측해라, 저 추잡한 짓을 하는 노인 좀 봐”라는 구절은 나오지만 ‘추잡한 짓’이 끝내 뭐였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한 없이 열려있고, 작가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고, 독자는 읽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런 매력 때문일까,<더블린 사람들>은 왠지 한 번은 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빌려 읽었는데, 각주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서 흐름이 많이 끊겼다. 다시 읽어볼 때는 다른 버전으로 읽어봐야지. 제임스 조이스 한 단계를 넘었으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까지는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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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의 소설은 재미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없는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돼요.. 《율리시스》가 그래요.. ㅎㅎㅎ

잠자냥 2017-11-08 17:15   좋아요 0 | URL
ㅎㅎ 얼마나 재미없는지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심리일까요. ㅎㅎㅎ

Falstaff 2017-11-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알라딘 서재에 서재 동무님 글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구먼요. 완전 형광등입니다. 한땐 얼리 어답터를 자부했는데 시간이란 놈이 거 참 힘이 세요.
전 이 책을 예전에 영문과 아가씨들이 가슴에 많이 끼고 다녀서 궁금해 읽었고, 이후에 돈 벌어서는 창작과비평사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 문 닫고 창작사던가로 이름 바꿨을 때 한 권 사 보고, 이후에 언젠가 한 번 더 사보고, 마지막으로 요즘에 펭귄으로 다시 읽었군요. 왜 그랬는지 ㅎㅎㅎ 재밌어요. 인생이죠 뭐.
잠자냥님의 필력도 대단한데, 으쌰으쌰, 좀만 더 힘을 내보셔요!!! 응원하겠습니다.

잠자냥 2017-11-09 09:24   좋아요 0 | URL
하하, 아직 그 기능을 모르셨었군요! 전 그 기능으로 폴스타프 님 글 올라오면 바로 읽고는 한건데. ㅎㅎㅎㅎ 네 이 책은 문학동네 버전으로 빌려 읽고 펭귄버전으로는 사두었습니다. ㅎㅎ 조이스의 다른 작품도 곧 읽어봐야지요- ㅎㅎ

케이 2017-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좋아서 이것 저것 검색해 보다가, 제임스 조이스가 무기력한 조국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는 견해(?)를 읽었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느끼진 않았어요.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참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 읽을 당시 우울감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때였는데, 뭘해도 안되던 중병이 이 책 읽고 한번에 치유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정말 은혜로운 책이예요.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책은 엄두가 안나고, 독서내공이 좀 더 쌓이면 도전해보려고요. 10년쯤 뒤?ㅋ

잠자냥 2017-11-09 10:5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그렇게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걸요? ㅎㅎ 비판과 각성이라. ㅋㅋㅋㅋ 오히려 무기력한 그 사람들에 대해 연민이 있다면 모를까요. ㅎㅎ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건 그렇게 다르기도 하군요. ㅎㅎ 전 <율리시스>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을 것 같아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8-08-06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조이스의 더블리너는 “ paralysis”로 범벅되어있다고 배웠어요 <율리시스>한국판은 저희집에 백과사전보다 더 큰 책이 먼지만 가득...읽고싶네요 햐 언제쯤ㅋㅋㅋ

잠자냥 2018-08-06 09:3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율리시스>는 죽기 전에 읽기는 읽어봐야 할 텐데.... 언제쯤? ㅎㅎㅎㅎ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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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좋아지는 작가가 있다. 카렐 차페크는 분명히 그런 작가에 속한다. 희곡 선집인 <곤충 극장>까지 읽음으로써 지금까지 읽은 차페크 작품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도롱뇽과의 전쟁>, <로봇>, <호르두발>, <별똥별> 총 일곱 권이 된다. 앞으로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읽은 뒤 차페크 평전을 읽을 계획이다.

그의 철학 소설 3부작으로 꼽히는 <호르두발>(1933), <별똥별>(1934), <평범한 인생>(1934)가운데 <평범한 인생>만 못 읽었는데,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이고 중고로도 비싸게 팔리고 있어서 새로 출간되지 않는 한 한동안 읽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이 작품이 없다. 사실 <호르두발>과 <별똥별>도 내가 신청해서 도서관에 비치했다. 지만지 시리즈에서 <평범한 인생>까지 출간한다면 또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을 예정인데,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다.

차페크의 모든 작품들이 대단한데, <곤충 극장>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는 희곡 3편이 실려 있다, 세 편 모두 100쪽 남짓으로 짧지만 강렬하다. 첫 희곡인 ‘곤충 극장’은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인간인 여행자가 곤충들의 세계를 엿보게 되는데, 그 곤충들의 삶이란 보면 볼수록 인간의 삶과 다름없다. 나비들은 암컷수컷 할 것 없이 짝짓기에 몰두한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른 짝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불견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쇠똥구리는 또 어떠한가? 똥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끌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이 세상에 더 없을 숭고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광적으로 집착한다. 쇠똥구리가 똥 덩어리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종일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돈, 성공,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어쩌면 저렇게 하나의 똥 덩어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쇠똥구리 부인: 진즉에 결혼을 했는데 아직 공도 없는 거요?
    귀뚜라미 부인: 공을 어디다 써요?
    쇠똥구리 부인: 제대로 된 똥 공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준다오. 진정한 삶- 즉 안정을 주지.
    귀뚜라미 부인: 아니, 아니에요. 삶이란 우리만의 가정이에요. 둥지를 짓고, 가게를 사고, 커튼도 달고요. 아이들도 있지요. 꼭 맞는 귀뚜라미 씨를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작은 가정, 우리의 세계.
    쇠똥구리 부인: 그렇지만 똥 공 없이 살림을 어떻게 꾸려가려고? 어디를 가나 굴리고 다녀야지. 새댁, 잘 들어요. 자기만의 똥 공이 있어야 남편을 꽉 붙들어 매놓고 살 수 있다니까!
    귀뚜라미 부인: 좋은 집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쇠똥구리 부인: 똥 공이라니까! (60쪽)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으므로 거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도 되는 맵시벌이 욕심 때문에 다른 곤충의 목숨까지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모습은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저 모두 곤충, 눈살 찌푸려지는 벌레들의 추잡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면서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된다. 이런 맵시벌을 비판하는 ‘기생충’의 역할이 흥미롭다. 흔히 기생충은 그 이름부터가 혐오감을 갖게 하는데, ‘곤충 극장’에서는 이 기생충이 차라리 가장 순수하다.



    여행자: 당신은 누구요?
    기생충: 나? 사실 별거 아니야. 빈털터리고 ? 고아, 기생충, 뭐 그렇게들 부르더군.
    여행자: 옳은 일이 아니잖아요. 저렇게 죽이다니!
    기생충: 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친구.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나처럼 배를 곯은 것도 아니잖아. 저 친구는 그저 바리바리 쌓아 놓으려는 거라고. 충격적이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저놈은 먹이 창고를 저렇게 꽉꽉 채워 놓고 말이야. 안 그래? 비수가 있다 이거지. 나는 맨손밖에 없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61~62쪽)

    여행자: 다 고기 한 덩어리 얻어먹자고 하는 짓이군!
    기생충: 그게 바로 내 말이야. 죄다 고기 한 덩어리 얻자고 하는 짓이라니까. 다른 딱한 새끼가 배를 곯더라도 말이야! 죄다 자기 배를 불려야 하는 거지! 안 그래? (64쪽)


이렇게 우화와도 같은 ‘곤충 극장’이 끝난 다음에는 스릴러와도 같은 ‘마크로풀로스의 비밀’과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SF를 보는 듯한 ‘하얀 역병’이 이어진다. <곤충 극장>에 실린 희곡 모두 좋았지만 나는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웬만한 독자라면 ‘그 비밀’을 눈치 챌 수 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그럴 거야 하는 의심이 심증으로 굳혀질 때쯤 독자의 예상대로 비밀은 밝혀진다. 하지만 그 비밀은 이 작품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 비밀을 통해서 차페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가 있다. 그 메시지는 ‘곤충 극장’의 마지막 장면과도 일맥상통한다. ‘곤충 극장’의 에필로그 부분에서는 하루살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삶을 예찬한다. 오직 단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하루살이들은 알고 있었다. 단 하루 밖에 살수 없기 때문에 그 하루가, 그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는 이 하루살이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의미를 잃었다. 사랑을 느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연민,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감정과도 거리가 멀다. 사람의 목숨이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런 삶이 끝없이 이어지면 깨닫게 된다.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다. 결승점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력질주를 해야 할 어떤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는 어쩌면 단 하루뿐일지라도 끝이 있는 삶을 사는 ‘곤충 극장’ 하루살이들의 삶이 더 의미 있으리라.

마지막 희곡인 ‘하얀 역병’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어떤 부분을 읽다가, 거의 100년 전 이야기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이야긴가 싶어져서 차페크의 혜안에 무릎을 쳤다. 한 도시에 나병과 증상이 비슷하지만 나병은 아닌, ‘하얀 역병’이 창궐한다. 치료법은 없다. 그런데 이 백색 바이러스 즉 ‘쳉 바이러스’는 신기하게도(?) 50세 이상만 발병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쉰 살 이상이면 어김없이 모두 이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도 그 세대는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살고 있다. 반면 젊은이들은 그 세대들이 모두 하나씩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없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이 하얀 역병의 창궐을 어떤 면에서는 반기기까지 한다. 이 바이러스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던 어느 가정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딸: 그렇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아빠! 우리가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뿐이에요. 일자리도 없고 말이죠. 우리도 인생을 살고 가정을 꾸리려면 뭔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죠…….
    어머니: 일리 있는 얘기에요, 여보.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도 얘 편이다 이거군-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전성기에 꼴깍 죽어 넘어가야 한다는 거네.
    아들: 아빤 또 왜 저렇게 흥분하고 계세요?
    어머니: 아무 일도 아니다. 얘야, 그저 그 질병에 대한 기사를 읽으셨는데-
    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어떤 식이든 희생이 필요하다고 내가 말했어.
    아들: 그건 사람들이 다 하는 소리에요, 아빠! 역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니까요! 누나는 결혼도 못 할 거고, 나 역시 끝도 없이 시험만 치면서 악전고투하고 살았겠죠…….
    아버지: 때마침 잘됐다 이거냐, 이 녀석아?
    아들: 어쨌든 요새는 학위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이 죽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죠. 뭐, 농담입니다! (253~254쪽)


그런데 이 아버지 또한 나중에 회사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감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자식세대들이 자신들이 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자신 또한 회사 동료들의 죽음으로써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그 ‘하얀 역병’이 반갑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게 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면서 그 병을 반긴다.

이런 설정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전율하게 된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법을 알아낸 의사 갈렌이 역병 치료법을 나라에 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고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 전쟁을 멈출 것. 병 때문에 죽어가는 목숨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목숨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게끔 하는 설정에서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택한다. 자기 목숨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전쟁을 놓지 못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차페크의 작품은 이렇듯 한없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그 풍자는 위트가 넘쳐서 읽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풍자와 해학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다. 인간은 어리석고 이토록 못났지만 그래도 불쌍한 존재라는, 이렇게 자기의 행복과 삶의 기쁨을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존재라는 연민어린 시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라도 어리석은 자신들의 존재를 돌아볼 줄 알고 ‘수정’할 줄 알거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차페크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어리석고 못난 인간들 때문에(물론 나를 포함해서) 늘 한숨짓다가도 그래도 인간은, 완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1%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하기에 그저 ‘절망’하면서 책장을 덮지는 않게 된다. 차페크의 문학이 갖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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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누르니 바로 피드 뜨는 잠자냥님 리뷰네요 ^^

잠자냥 2021-06-14 16:45   좋아요 2 | URL
제가 어쩌다 보니 카렐 차페크 마니아 1위인데요... 쿨럭쿨럭... 이 책 정말 재미나요. <곤충극장> 희곡이긴 하지만 읽으시고 괜찮다 싶으면 다음엔 차페크의 <도룡뇽과의 전쟁>도 추천합니다. 참, <도룡뇽>은 희곡 아닙니다~~ ㅎㅎ

coolcat329 2021-06-17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 어제 알라딘 우주에서 딱 한 권 있는 이 책 구해서 샀습니다. 2만원 맞추느라 또 끙끙거리면서요~😅😅

잠자냥 2021-06-17 12: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애쓰셨네요! 우주점에 있었군요. 2만원 맞출 게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ㅎㅎ 애쓰신 만큼 재미나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