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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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그 사람은 나를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아침마다 보지만 그에게 나는 그 앞을 날마다 지나치는 수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그 점포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던가? 아, 단 한 번, 정말 목이 말랐던 어느 날 생수 한 병을 산 게 고작이었다. 그 사람은 매우 비대한 몸집으로 작은 상자와도 같은 그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다. 비대한 몸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 검고 커다란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종일 지하철 가판대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답답하지는 않을까 공기도 나쁠 텐데, 숨 막히지는 않을까. 미래가 있을까.....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부디 그 작은 상자 속에 다시 갇히는 일이 없기를, 어디론가 조금은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갔기를. 그녀뿐만이 아니다. 집 전철역 근처에는 신문 가판대와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 아침부터 구두를 고치는 구두수선공도 볼 수 있다. 한 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종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람은 어떤 풍경, 어떤 모습일까.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을 읽노라니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담배 가게 소년>에는 그들처럼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배운 소년이 있다. 그의이름은 프란츠 후헬. 엄마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던 프란츠는 엄마의 부유한 애인의 죽음과 함께 도시로 나아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이 빈의 한 담배 가게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고향을 떠나 대도시 빈에 첫발을 내딛은 프란츠는 악취와 소음 속에 어지럽기만 하다.



“젊은이 어디가 안 좋아요?”
“아니에요.” 프란츠가 얼른 대답했다. “그냥 이 도시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요. 악취도 조금 나고요. 아마 배수로에서 나는 거겠죠.”
 “악취가 나는 곳은 배수로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세월이에요. 말하자면 부패한 세월이죠. 부패하고 타락하고 황폐해진 세월!”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 20쪽)


어쩔 수 없다. 도시에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살아가야 하므로. 담배 가게 주인 오토 트르스니에크는 프란츠에게 이런저런 일을 가르치면서 한 가지 특별한 임무를 준다. 모든 신문을 샅샅이 볼 것. ‘올바른 신문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담배 가게 단골들은 가게 주인에게 온갖 적절한 조언과 정보를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게 오토의 주장이다.

이렇게 담배 가게에서 프란츠는 신문을 읽고 담배와 신문을 사러 오는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성장한다. 프란츠가 세상을 배우는 수단이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였다면 현실성은 조금 떨어질 것이다. 신문도 신문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빈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담배 가게 손님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10대 소년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도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평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조금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담배 가게 손님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의 등장에 프란츠도 놀랐겠지만 나 또한 어라? 하면서 자세를 고쳐잡고 읽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소설이 조금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궁금해진다. 오로지 픽션이라면 좀 싱거울 것 같다(이 책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프란츠는 이 특별한 손님에게 즉각 매료당하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과 달리 세상에 찌들지 않은 프란츠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 아네스카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프란츠는 프로이트 박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로부터도 뾰족한 답은 얻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조언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담배 가게 소년>은 이렇게 프란츠와 프로이트의 색다른 우정, 프란츠와 아네스카의 사랑, 프란츠와 오토가 운영하는 담배 가게라는 작은 세상을 둘러싸고 서서히 광폭해지는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 등 그즈음 격변하는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또 광포한 시대를 살아가고 견뎌내는 온갖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 세태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란츠가 뭐랄까 좀 평면적인 인물 유형이라 주인공에게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착하고 순수한 소년이랄까. 어떤 순간에는 좀 뒤틀리기도 하고 내적 갈등도 과하게 겪었다면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네스카에게 그런 면모를 살짝 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곧 가라앉는다. 아직 미성년인, 덜 갖춰진 예민한 성정의 10대 소년이라면 좀 더 난폭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들, 아니 엄마와 주고받는 편지들도 ‘지나치게 착하고 아름답기만’하니까 어쩐지 낯간지러워지기도 한다.

아네스카에 대한 묘사도 물론 프란츠의 눈으로 그렸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해 보인다. 매우 쉽게 사랑을 주고 또 다른 남자에게로 쉽게 날아가는 보헤미안 여자. 어찌 보면 그저 전형적인 ‘나쁜 여자’ 정도로만 그려진 점도 아쉬웠다. 프란츠의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 느낌이랄까. 프란츠도 아네스카도 조금 더 입체적 인물로 그려졌다면 그들의 삶과 고민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안타깝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이 작품에 그려지듯이 이토록 좋은 사람일까? 이런 의구심도 든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난 왠지 프로이트가 인간으로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러나 구스타프 융 등 그의 제자들과 있었던 이런저런 일화를 보면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척 성마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한낱 시골뜨기 소년 프란츠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따스(?)하게 나온다니 살짝 괴리감이 들었다. 차라리 괴팍한 면이 더 두드러졌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인물의 성격 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마 결말은 좀 예상 밖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담배 가게 유리창 한쪽에 자신이 꿈꾼 내용을 적어 붙였던 프란츠. ‘제라늄이 밤에 밝게 빛난다. 하지만 그건 불이다. 어쨌든 늘 춤을 출 것이다. 빛이 사’ (267쪽) 라는 메모처럼 어두운 현실에서도 희망이 존재함을 이 작품은 조용히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제탈러의 작품을 읽은 것은 <담배 가게 소년>이 처음이다. 기대만큼 썩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한평생>까지는 읽어볼 계획으로 책을 사두었다. <한평생>은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한평생>이 로베르트 제탈러의 대표작인 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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