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선물은 어렵다. 살아갈수록 함부로 하기 뭐한 선물 중 하나가 책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므로 어렵고(다락방 님처럼 책 많이 읽는 사람에게는 이미 갖고 있거나 읽었을 거 같아서 선물하기 어려운), 책을 많이 안 읽는 사람에게는 그 눈높이에 맞게 골라야 하므로 또 어렵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상대가 책을 많이 읽는지 안 읽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사이일 때가 아닐까. 이런 사이에서는 멋모르고 책 선물했다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언제부터인가 책 추천을 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 또는 요구에는 딱히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여기 서재분들처럼 책 많이 읽는 사람들 말고 현실 세계(?)의 일반인들에게.....)
아무튼 다락방 님의 ‘당신에게 보내는 럭키박스’ 페이퍼를 흥미롭게 읽었던 참에, 건수하 님이 내 럭키박스도 궁금하다고 하셔서 댓글로 남길까 하다가 페이퍼를 적어본다. 아마도 내 서재를 오래 봐오신 분들은 대충 그 박스(?)에 들어갈 책을 유추하실 것 같은데, 건수하 님은 관련 페이퍼를 읽으신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몇 자 다시 적어본다.
3권은 간단하다. 집사2에게 선물한 책이기도 하고 현재 우리 집에 두 권씩 있는 책이기도 하다. E.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과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하워드 진 <역사의 힘> 이 세 권의 책은 다락방 님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계속 언급하듯이 나 또한 계속 꼽을 수밖에 없는 책 같다. 특히 내게 <전망 좋은 방>은 다락방 님의 <새벽 세 시> 같은 의미랄까.
이 세 권은 내 가치관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사람을 알아보기(간 보기??)에도 좀 편한, 예컨대 나만의 ‘벡델테스트’ 같은 책이랄까. 그런 의미도 포함된다. <전망 좋은 방>은 사랑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또 상대와 그런 관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물하기도 했다.
<전망 좋은 방>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루시와 샬롯이 묵게 된 펜션의 방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전망이 좋지 않다. 창을 열고 이탈리아 풍경을 한껏 바라보기를 꿈꿨던 루시에게 전망이 나쁜 방은 얼마나 청천벽력인가! 낙담하고 있던 그녀에게 펜션의 또 다른 손님인 애머슨 부자(父子)가 나타나 자신들은 남자라서 ‘전망’ 따위는 상관없다면서 ‘전망 좋은’ 방을 루시와 샬롯에게 양보한다. 이때 루시는 처음으로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조지 애머슨’을 알게 된다. 루시는 이미 약혼자인 ‘세실’이 있던 상태인데, 결혼을 약속한 뒤 루시와 세실이 나누는 전망에 관한 대화는 많은 점을 생각게 한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정말 그래요. 아무래도 제가 시인인가 보네요. 당신을 생각하면 배경은 언제나 방 안이에요. 재미있는 일이네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응접실입니까? 바깥 전망이 보이지 않는?” “네, 전망이 없는 방이에요. 그게 뭐 문제인가요?” “나는 당신이 나를 생각할 때 이런 넓은 야외를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그가 질책하듯 말했다. “세실,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열린책들, <전망 좋은 방> p.156)
세실은 안락한 집안에 루시를 가두면서 자신을 생각할 땐 넓은 야외를 떠올렸으면 좋겠다고, 그러지 못한 약혼녀를 질책한다. 어불성설이다. 안락하니까 이곳이 최고라며 집 안에, 방 안에 가두면서 자기를 생각할 땐 탁 트인 야외를 생각하라니......... 미친놈인가.. -_-?
반면 조지는 루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같은 책 p.241) 그리고 결국 루시는 자신에게 좋은 전망을 선사한 사람, 열려 있는 공간, 다른 모든 것들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 기존의 교양, 인습,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 즉 ‘좋은 전망’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전망 좋은 방’을 포기했던 남자 ‘조지’가 그토록 찾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집사2와 나는 서로 안락한 방에 가두기보다는 좋은 전망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고, 그렇게 살고자 지금도 여전히 애쓰고 있다.
그 외에 <타인의 고통>이나 <역사의 힘>은 내가 그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하면서(나의 약한 부분) 살고 싶기도 했고, 상대도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물했다. 무엇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만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도 했고 이 두 사람도 나만의 벡델테스트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하워드 진을 좋아하는데 극우이거나 우파일 수 없다는... 미안하다. 극우이거나 우파는 만나기 어려울 거 같다). 사실 나는 그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연애 상대로든 우정 상대로든 상관없이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테스트하는 용도로 퀴어 영화 관련 질문을 툭 던질 때가 있다. 무슨 영화 본 적 있어요? 이러면서... 그때 그 사람이 말하는 본새로 대충 나랑 맞을 성향의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혐오발언 조금이라도 하면 그대로 아웃.
위의 세 권은 누누이 말했던 책이라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이 럭키박스라는 게 최소 4권은 넣어야 하는가 보더라...? 근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섯 권 넣고 싶어요. 숫자 4보다 5가 딱 떨어지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아래 두 권 중 뭘 빼야 할지 도무지, 도저히 고민 끝에 결정하지 못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롭게 추가한 영광의 두 권은 다음과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웃지마세요.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이 책 새로운 나만의 벡델테스트 용도로 아주 적절한 것 같다. 일단 제목만 보고 우욱할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이걸 선물하면 나조차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이 한국에는 90% 이상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이 이걸 왜 선물했을지 궁금해 하면서 읽어볼 의향을 가진 사람, 그러고 나서 어떤 판단을 할지 이야기해 보면서 그 사람을 계속 만날만 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책 읽고 있었더니 집사2가 그게 무슨 책이야! 하며 깜놀! 했는데 내가 이러저러하다 설명해줬더니 동공지진이 잠시 일었으나... 아아 그렇구나. 근데 동물하고 섹스까지 하는 건 좀.... 정도에서 그쳤기에(혐오발언 하지 않음) 역시 너는 내 동반자로구나 하고 넘어갔다는.
로베르트 발저의 책도 한 권 넣을 것 같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아니면 <산책자> 중 하나. 나는 초울트라 신자유주의 한국사회나 이 지구에서 말하는 성장이나 발전 계발 진보 같은 개념에 좀 많이 회의적이고 의문이 많아서 그런 생각에 반기를 드는 작품을 만나면 반갑다. 그런 이들 중 발군의 작가가 로베르트 발저가 아닐지. 이 책도 읽어보고 나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서로 생각이 통할지 통할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번이라도 가난하고 고독한 신세를 경험해본 자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타인의 굴욕, 타인의 고통, 타인이 무력함, 타인의 죽음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므로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산책자>, ‘빌케부인’, 15쪽)
아 그런데 이 글 쓰다가 럭키상자는 럭키상자고, 상대가 이런 책 럭키상자에 담아주면 폭탄상자다!!!!!!!!!! 무조건 도망갈 거 같은 책들이 떠올랐다. ㅋㅋㅋㅋㅋㅋ 나만의 폭탄상자는 다음과 같다. 책을 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책 선물하는 분들은 친구로도 못 사귈 거 같다는.........
책 링크 연결하기도 싫어서 이미지로만 올린다.
네, 가던 길 그냥 가세요........
나한테 왜 이러세요.......
저는 오그라들어서 그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달 출판사에서 나오는 에세이들.... 제목이 왜 이래...... ㅠㅠ
이병률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혼자가 혼자에게> 등등.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김동영, 김병수 <당신이라는 안정제>
봉현 <베개는 필요 없어, 네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