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은 평소의 나, 아니 몇 달 전의 나였다면 분명히 읽지 않고 넘겼을 책이다. 자기계발서로 보였고, 스마트폰과 인터넷 SNS가 당신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있으니 스마트폰을 닫고 SNS를 끄고 어찌어찌하면 집중력을 높여서 결과적으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흐르는 뻔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공’을 위해 이렇게 자기를 북돋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멀티태스킹을 멀리하고, 잠을 푹 자고 가공식품이 아닌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음식들 위주로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인의 집중력이 극도로 낮아진 이유와 원인을 사회적 관점에서 파헤치는데 소름끼치도록 충격적인 부분도 있어서 내게는 이 책 또한 하나의 ‘도끼’와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어쩌다 이 도끼를 만나게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집사2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두 번째 이유는 떠난(?) 공쟝쟝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나 또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집사2는 굉장히 집중을 잘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자신이 테니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몰입의 즐거움’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라며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를 내게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나는 ‘몰입의 즐거움’ 또한 자기계발서 아닐까 의심했었다). 얼마나 몰입을 잘 하느냐면 자기 주변이 몹시 시끄럽고 산만해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주변 스위치를 다 꺼버린 것처럼 그걸 하고 앉아 있다.
이렇게 극강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몰입을 잘하던 인간이었는데 요즘에는 도통 집중이 무엇이요, 몰두는 뉘 집 개 이름인가 싶을 정도로 산만해졌다. 최근에는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다가 아, 얘 진짜 요즘 문제네 싶어졌는데 나름 집사2가 집중할 만한 영화로 골랐는데도(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도통 화면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오히려 이미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내가 더 몰입하고 있었다(두 번 봐도 재밌어.....-_-V). 집사2는 영화를 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영화를 보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보는 것도 대단한 게 아니었다. 틱톡 같은 영상을 왜 영화를 보면서 보는 걸까? 아니, 너 왜 영화를 못 봐? 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확실히 집사2는 요즘 긴 소설, 문학, 긴 영화 등 뭔가 길다 싶으면 꾸준하게 집중해서 보지 못한다. 대신 틱톡, 유튜브, 트위터 등 짧게 소비하고 마는 영상이나 글을 훑듯이 보면서 넘기고 있다. 저놈의 스크롤 손가락 좀 보소......... 집사2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인지한다. 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지? 왜 맨날 이런 의미 없는 것만 보다가 자는 거지? 이러고 (내) 공부는 언제 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없는 거 같아. 본인 탓을 하면서 무기력과 우울감에 빠진다. 그래서 귀찮아지니까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다. 현충일 연휴에 나는 자전거를 타러 나갔는데, 귀찮다고 집에 있던 이 인간은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대로 누워서 스마트폰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요약해서 이야기해줬더니 이런저런 앱을 삭제했으면서도 여전히 스마트폰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플에 ‘안녕’이라는 글을 남기고 사라진 공쟝쟝은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쟝은 <도둑맞은 집중력>에 후한 100자평을 남겼다. 그 100자평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싶은 의혹의 눈길을 지우고 읽기로 결정했었다. 쟝은 이 책의 무엇을, 이 책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생각을 했기에 ‘안녕’이라는 글을 남기고 과감히 떠난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집사2의 집중력 저하도(그리고 그걸 본인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는 것도), 쟝이 SNS를 떠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 누군가의 눈에는 책을 많이 읽고 그러니까 집중을 잘하는 것처럼 보일 나조차도 요즘 독서량이 줄었으며 책을 읽다가도 스마트폰으로 종종 손을 뻗는- 그리고 이런 행동에 불만을 느꼈던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을 비롯해 집사2, 그리고 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집중력이 부족하고 SNS의 알림이나 ‘좋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다른 일을 뒤로 미루거나 몰두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할 만큼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자책은 그만하자는 것이다(물론 쟝이 그저 이런 이유로만 떠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 책의 저자 요한 하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자신의 대자(代子)인 ‘애덤’- 그토록 몰입과 집중을 잘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는 모습에 절망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수시로 SNS를 확인하며 그 안에서 인정 욕구를 채우느라 잔뜩 쌓인, 읽어야 할 책들을 죄책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또한 자신의 집중력 저하가 스마트폰과 인터넷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제로 이것들과 떨어진 생활을 하고자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과 노트북을 챙겨서 케이프코드의 프로빈스타운으로 떠나 3개월 동안 생활하기 시작한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의 이 극단적인 방법이 성공했다면 이 책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이런 노력이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그때부터 이와 관련한 각계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현대인의 집중력 저하 현상은 시스템이 만든 결과임을 알게 된다. 구글의 전략 전문가였던 ‘제임스 윌리엄스’는 그에게 단연코 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단기간 특정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방법은 지속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에 따르면 거대한 침략 세력- 즉 테크 기업들의 감시 자본주의가 현대인의 주의력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절제가 주요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163쪽)일 뿐이다. 예컨대 고열량 가공식품이 넘쳐나는 현대에 비만을 단지 개인의 게으름, 무절제함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스냅챗, 트위터 등 거대 테크 기업들은 인간 본성을 조종하는 데 혈안이다. 저자는 이를 군비 경쟁에 비유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할까?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돈이다. 사람들이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창조한 네모난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며 종일 그 안에 갇혀 있을 때 천문학적 이윤이 발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시선을 오래 가둬두려고 갖은 생각을 짜낸다. 그중 하나가 스키너의 즉각 보상 이론을 적용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좋아요-하트-리트윗의 보상) 방식이다. 무한 스크롤 기능도 그렇다. 트위터 같은 앱은 한 번 열면 끝없이 스크롤을 하게 되어 있다. 아주 예전에는 인터넷이 여러 페이지로 나뉘어 있어 한 페이지의 맨 밑에 도착하면 그때는 버튼을 클릭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잠깐 멈추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까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웹사이트는 무한 스크롤 형태이다. 더 이상 생각이 필요 없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롤을 내리면 된다. 그러다 맨 밑에 도착하면 상당한 양의 내용이 또다시 자동으로 다운로드된다. 이렇게 스크롤은 끝없이 이어지고 사용자는 10분만 보려던 것이 어느새 한 시간이나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것은 한탄과 자책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빠르게 흐르는 화면을 통해 정보를 훑고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착각한다. 인터넷의 속도에 취해 “온 세상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어느 주제에 관해 무엇이든 알아내고 배울 수 있다고 느끼게”된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사람들은 점점 진이 빠지고,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52쪽)당한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하고 깊이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따라잡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하고, 늘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있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다. 관계에서의 깊이도 시간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다. 당연히 주의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깊이를 요구하는 모든 것이 악화되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산만함으로 가득 찬 삶은 훼손된 삶이라는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면 이루고 싶은 일들을 이룰 수 없다. 책을 읽고 싶지만 소셜미디어의 알람과 불안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방해받지 않고 아이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상사가 메시지를 보냈는지 보려고 초조하게 계속 이메일을 확인한다. 회사를 차리고 싶지만 질투와 초조함을 일으킬 뿐인 페이스북의 게시물들 사이로 삶이 흩어져버린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이유로 잠시 멈추고 생각할 수 있는 고요함(차분하고 명료한 공간)을 충분히 얻을 수 없는 듯 보인다. (24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집중력’은 개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중력이 바닥을 보이거나 눈에 띄게 떨어진 사회는 사회 전반에 위기의 신호가 난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이 책에 따르면 알고리즘은 우리를 웹에 오래 머물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즐겨 보고, 무엇에 흥분하고, 무엇에 화를 내고, 무엇에 격노하는지를 배운다. 알고리즘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집중력을 뚫고 들어올 방법을 학습하는데 그 작동방식 때문에 대개의 웹사이트들은 인간을 자주 분노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분노 자체는 인간의 집중력을 망가뜨린다. 사람들이 분노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평소만큼 집중하지 못하며 정보 처리의 깊이가 얕아진다. 더 얄팍하고 부주의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웹사이트들은 ‘공격, 나쁜, 비난’ 등의 키워드를 알고리즘의 바탕으로 삼아 인간의 분노에 부채질을 할까? 사람들은 밝고 기분 좋은 내용보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에 더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부정편향). 그러다 보면 결국 알고리즘은 가짜뉴스 같은 자극적인 정보를 사용자 앞에 내놓기 마련이다. 이렇게 거짓 정보와 분노, 비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의 뇌는 문제를 깊이 인식해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과도한 각성상태에 머물다 망가진 집중력, 훼손된 합리성과 지성으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진짜 문제를 파악해 공상과 구분하고, 해결책을 떠올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긴 시간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온전히 기능하는 사회를 만들 능력을 잃게 된다. 집중력의 위기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동시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쉽게 이끌리고, 그러한 해결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트위터와 스냅챗을 오가느라 주의력을 박탈당한 시민으로 가득한 세상은 위기가 연달아 발생해도 그중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26쪽)
거대 테크 기업들의 감시와 조작 자본주의만이 문제일까? 현대 사회는 더 빨리 걷고 더 빨리 말하고 더 오래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살면서 바로 거기서 생산성과 성공이 나온다고 믿는다. 일이 많은 것(과도한 업무량)과 멀티스태킹이 능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는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스트레스가 발생하고 수면 부족에 바쁘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가공식품을 만성적으로 섭취하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뇌를 과각성 상태로 몰아가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숲속에서 곰을 맞닥뜨린 인간은 곰(눈앞에 닥친 위협)을 피할 생각만 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늘 이런 곰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을까? 단지 눈앞에 닥친 그 문제만을 해결하는 데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집중력 개선을 위해서는 한 번에 하나씩만 하고, 더 많이 자고, 책을 더 많이 읽고, 딴생각을 할 틈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스템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곰이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데 잠을 더 많이 자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책- 특히 소설 읽기는 시스템이 바뀌기 전에도 소소하게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독서는 “사람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가장 단순하고 흔한 형태의 몰입 중 하나”이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독서는 “자신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125쪽)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은 소설을 읽음으로써 “사회적 상황을 그려보고, 깊고 복잡하게 타인과 그들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소설은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우리가 가진 가장 풍성하고 귀중한 형태의 집중)을 키워주는 일종의 공감 체육관”(133쪽)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힘, 공감의 힘을 아는 나로서는 책- 소설 읽기를 통해 길 잃은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집중력을 잃어버린 집사2가 소설을 집어 들었다. 집사2의 집중력도 떠난 쟝도 돌아오기를-
공쟝쟝 23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자냥
829-1551
공쟝쟝 쟝쟝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알라딘이 위독하시다
공쟝쟝 21세 잠자냥이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황지우, <심인尋人> 패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