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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근 3년간 수많이 들었던 단어는 바로 '발전'. 4대강도 그,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시작되었고, 지금 이나라의 대통령을 뽑았던 것도 발전이 이유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발전'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모든 일에서 '발전'을 말한다. 개인도 '발전'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투자한다. 여기도 저기도 '발전' 때문에 때려 부시고, 다시 세우고, 돈을 더 받고. '발전'의 늪은 빨아들이는 속도가 강해 빠져나오려 하기 전에 묻혀버린다. 사람들은 '발전'의 광신도가 된 것처럼 그것이 최고인 줄 안다. 자문한다. 그 '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 너? 국가? 전 세계?
'발전'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돈'이다. 바로 '자본'. '발전'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이 많으면, '발전'하기도 쉽다. 그것이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냥. 사람들은 '발전'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된 '돈'에 침흘리고, 세계 나라들이 '발전'하고 싶은 이유는 '돈'이라는 이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거기다 덤으로 '힘'도.
이렇게 '발전'의 늪으로 빠져드는 길목 앞에서 <反자본 발전사전>은 '발전' 안에 숨겨진 개념들을 끄집어내며, '발전'의 모순과 파괴력, 비인간적인 면을 낱낱이 파헤친다.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일지도 모를, 무서운 진실들이 눈 앞에 드러난다.
발전, 환경,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국가, 기술.
이 19가지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좋다고 생각하냐고 묻고 있고, 하나의 기준으로 봐왔던 세상을 다르게 보라고 부추기고 있다.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우리가 누리는 과학 진보와 산업 발달의 수혜가 저발전 지역의 향상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새롭고 과감한 사업에 착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자기들 중심적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맞는 것처럼 인식한다.
말은 인식을 정의한다.그렇게 해서 말은 다시 대상이 되고 사실이 된다. 저발전이라는 개념이 실재하는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인다. 저발전은 이 세상이 하나이고 동질적이고 단선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는, 지극히 서양적이고 수용 불가능하고 증명 불가능한 전제를 지지의 발판으로 삼는 비교급 형용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 48p
누군가가 나서서 인식의 프레임이라도 짜준 듯, 우리는 '발전'에 목말라 있었다. 그것도, 수십년간 미치도록. 하지만. 그 '발전' 속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결국, 다툼과 죽음, 미움과 시기, 거짓과 위선들이 아니었던가. 자연은 점점 황폐해지고, 환경은 점점 파괴되어 간다. 지구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을 아무렇지 않게 부시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마저 돈으로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저발전 국가'에서 사는 사람은 낮게 보기 시작했고,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것은 경제 자원이나 서비스의 생산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나 다음 세대를 살찌운다. 가난한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경제학자들이 자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리 자기가 사는 향토에서, 고장에서 자원을 조달하는 실요적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 350p
'발전'으로 충만한 강대국들은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약소국'들에게 '인류의 구원과 평화'라는 아름다운 모토 아래 도움의 손길을 뻗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도움'은 그리 순수한 도움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분명, 그 도움의 손길 아래 깔린 '요구'는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그들이 더 높은 '발전'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자원'이나 '환경'과 '인력'을 값사게 사용하면서 그것이 구원의 손길인 것인냥 생색을 부리기도 한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춰 '부'와 '가난, 빈곤'의 개념을 나누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세뇌해 '발전'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마약에 손을 댄 듯, '발전;의 형편없는 의미를 알아버린 사람들은, 늪에서 나올 수 없다.
지혜를 가르치는 여러 학파에서는, 특히 불교처럼 아직도 융성한 종교에서는 존재의 목적을 자각의 획득으로 규정하며, 쾌락을 절제하고 절대로 하나의 가치만을 무한정 쌓지 않고 다양한 가치 사이의 균형에 주목하는 것을 행복한 삶의 비결로 본다. 물질적 결핍을 우리는 창피스러운 가난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기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그것은 다른 유형의 결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측면에 불과했다. 사람을 정말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세레르족은 믿는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다." 세레르 속담은 그렇게 못 받는다. - 533p
트루먼 대통령이 '저발전'이라는 개념을 내세웠을 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던 것은 아닐까? 분명, 그들의 말대로라면 발전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행복해져야 하며, 윤택해져야 한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말이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단어는 이제 듣기만 오싹하고 냉정하고, 무서운 개념이 되어 가고 있다. 강대국이 더욱 강해지려는 욕망을 뜻하며, 부를 가진 이가 더욱 부를 갖고자 몸부림치는 개념으로 생각된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그러한 공포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발전'이라는 이면에 감추어진 많은 진실들은 알면 알수록 불편하지만, 알아야 한다.
'발전'이라는 말을 내세운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발전'이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죽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줬다. 얼마나 많은 자연이 파괴되고 우리의 터전에 망가져가는지 깨닫게 해줬다. 그 확신 없는 '성장'에 믿음을 가졌던 우리는 크나큰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래도 '발전'만을 믿는가?
어제 MBC에서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다큐를 방송했다. 사람에 상처받은 이들, 도시의 바쁨에 넌더리가 난 이들, 자본이 싫어 떠나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작가였고, 사람이었고, 이웃이였다. 누군가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목욕탕 나들이가 행복했고, 지리산 행복학교에서 배운 글 한 구절에 행복했다. 함께 모여 노래부르는 게 행복했고, 봄을 알리는 새싹에 행복했다. 그들은 '발전'을 떠나온 이들이었다. 부유하진 않아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있었고, 궁핍하긴 해도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허망하게 쫓아온 '발전'이라는 늪에서, 당당하게 빠져나가 행복을 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를 고통받게 하고 이루어낸 '발전'은 '성장'은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 모두가 파괴되어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그 늪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사람만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