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나무


아파트 옆
온 가지 다 잘리고
그저 몸뚱이만
남은 커다란 나무

뿌리를 깊게 내리면
건물을 파먹는다
그래서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겠지

살아갈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은
미친듯이 꽃피우고
향기를 뿜어내며
봄바람을 흔드는데

살아야지
견뎌내야지
울지 말아야지

속으로
가만가만
말을 건네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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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단(未登壇)


에헴, 내 한마디 할게요
당신 같은 미등단
따까리가 시를
얼마나 안다구
등단한 시인들의
시에 감히 평가를

낭중지추(囊中之錐)
그 말 몰라요?
재능이 있으면
저절로 알려지는
법이죠, 암요

방구석에서
찌끄러기 글
쓰는 사람이
뭔 재능이 있다고

아니꼬우세요
아니꼬우면
출세를 아니,
등단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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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의 의사


보름 넘게 머리가
아파서 의사를
찾아갔더니
3분 진료에
아세트아미노펜을
처방해 준다
무성의하게

말은 왜 그렇게
빨라 환자가
짐 덩어리니
빨리 치우게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환자 얼굴은 딱
한 번 보더군

의사 양반,
댁은 MBTI 검사
T 나온 거 맞지?
그래,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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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질 때


어르신 놀이터
글자가 박힌
승합차가 줄줄이
흰머리의 할머니들
가로수 벚꽃 그늘에
삐죽삐죽 서있다

아, 글쎄 그 집
할머니가 치매라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오락가락
저기 노인들도
다 그런 거야

물크러진 벚꽃잎
덮고 개미한테
뜯어먹히는
지렁이 한 마리
어제 내린 비에
길을 잃었구나

어린이집 아가들은
콧물을 흘리며
되똥되똥 걷지

승우야, 저것 좀 봐
벚꽃이 날리네
자, 인사하자

벚꽃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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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중년 여자들의
컬컬한 목소리
길바닥을 가르며
그 형님은요
삶은 계란이
보약이라고
매일 계란을
다섯 알씩

비좁은 형틀의
케이지 할딱이며
항생제에 절여진
닭들은 스트레스에
못 이겨 동족을
뜯어먹는다더군
분노와 슬픔의
누런 피비린내

불완전한 미래의
채식주의자
고기를 다 끊고
남은 것은
삶은 계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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