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굴복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헬먼이 시나리오를 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Dead End(1937)'에는 하나의 도로를 공유하는 부자와 빈자가 나온다. 이 극명한 계층 대립의 구조는 헬먼이 바라본 미국 사회의 내면이었다. 아서 펜 감독의 1966년작 'The Chase'에 이르면 헬먼의 그러한 시각은 더 날카로워진다. 인종 차별, 부패와 폭력, 성적 타락... 헬먼은 텍사스 가상의 소도시 Tarl County에 그 모든 것을 구현해낸다. 명백히, 그 도시는 철저히 썩은 미국 사회의 축소판임이 드러난다.

  부유한 은행가 발 로저스는 Tarl County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자이다. 마을의 보안관 칼더(말론 브랜도 분)는 상식과 공정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 또한 마을의 다른 사람들처럼 로저스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던 버바(로버트 레드포드 분)의 탈옥 소식이 들린다. 도주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살인 사건에 휘말린 버바. 칼더는 그가 마을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로저스의 집에서는 부자들의 호화로운 생일 파티가 열린다. 그곳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부행장 에드윈의 집에서 그들만의 파티를 즐긴다. 버바의 탈옥 소식에 마을은 긴장과 흥분에 휩싸인다. 자경단이 버바를 잡겠다고 난리를 치는 가운데, 마침내 버바가 마을에 숨어드는데...

  Rotten to the core. 영화 속 Tarl County의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로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듯 하다. 버바의 아내 안나(제인 폰다 분)는 로저스의 아들 제이크와 불륜 관계이다. 부행장 에드윈의 아내 에밀리는 유부남과 바람이 났다. 에드윈의 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은 이 마을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칼더로 대변되는 공권력도 무시한다. 젊은 여자는 지나가는 흑인을 보고 탈주범이라고 외치고, 남자들은 린치를 하려고 한다. 칼더는 그들로부터 흑인을 안전하게 떼어놓기 위해 구치소에 가둔다. 그러자 자경단원들은 떼로 몰려가서 칼더를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보안관 칼더는 자신이 온전히 관할하는 영역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그의 모습은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받는 경멸을 입증한다. 리브스 부인은 아들을 잡지 말라며 돈다발을 들고 칼더를 찾아가기까지 한다. 칼더가 거절하자 부인은 반문한다. '돈이 충분하지 않은 거야?' 칼더는 로저스의 하수인으로 취급받으며, 돈으로 매수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썩어빠진 마을에서 그나마 온전한 양심을 지닌 이는 칼더이다. 그는 마을의 모든 것에 역겨움을 느끼고 떠나고 싶어한다. 입양을 하자는 아내의 말에, 칼더는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 마을은 결코 한 인간이 온전히 성장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헬먼은 미국의 부패하고 타락한 내면을 영화 속 Tarl County에 투영한다. 칼더가 대변하는 공권력은 로저스가 가진 돈의 힘에 조롱당하고 제압된다. 구치소에 갇힌 흑인은 린치를 당하며, 칼더의 부인이 마을 사람에게 요청하는 도움은 묵살된다. 그곳 사람들의 영혼은 철저히 썩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버바가 숨은 폐차장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불꽃놀이를 하듯 즐거워 한다. 젊은이들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무언가 대단한 구경거리를 기대하며 술꾼들은 자리를 지킨다.

  이 미쳐 돌아가는 마을에서 죄가 없는 버바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영화 'The Chase'의 세계는 너무나도 암울하다. 헬먼은 미국 사회가 분열과 갈등에 휩싸여 있음을 직시한다. 계층의 대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을 젊은이들의 무절제와 향락은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의 타락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벌어져 있다. 버바는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를 냉담하게 외면한다. 로저스는 술에 빠져 지내는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 린치를 당하는 흑인은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대한 단면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 Tarl County는 다양한 집단의 정치적 목소리와 인권 운동으로 끓어오르던 1960년대 미국 사회 그 자체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칼더는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칼더의 모습은 구약 성서의 인물 롯을 연상케 한다. 구약 성서 속 죄악의 도시였던 소돔(Sodom)은 신의 징벌을 받아 파괴된다. 그곳의 유일한 의인 롯은 불바다로 변한 소돔을 뒤로 하고 필사적으로 빠져 나온다. 버바가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던 칼더는 패배자로 그곳을 떠난다. 헬먼은 양심과 윤리가 무너져 내린 미국의 황폐한 내면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감독 아서 펜은 제작자 샘 스피겔과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편집권을 뺏겼다.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고, 이듬해 아서 펜은 'Bonnie and Clyde(1967)'로 자신의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 냈다. 그의 영화적 인장(印章)이 흐릿한 'The Chase'에서 결국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공산주의자 헬먼의 강건한 목소리이다. 헬먼은 미국의 내면을 뼛 속 깊이 파내려 가며, 그 비참한 풍경을 영화 속에 구현한다.


*사진 출처: tcm.com



**릴리언 헬먼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Dead End(193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ead-end-19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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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강에서 잡아온 작은 물고기를 수줍게 내어 보인다. 카메라에 담긴 이 마을의 시간은 매우 느리고, 평화롭게 흐른다. Naomi Uman의 증조부는 1906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나오미 우만은 증조부의 고향 마을 Legedzine(Kyiv에서 250km 떨어진 곳)으로 떠난다. 여러 해를 그곳에서 보내면서 관찰자로, 마을 구성원으로 Legedzine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러닝타임 55분의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Unnamed Film', 이름없는 이 소박한 다큐는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다.

  이제 막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마을 사람들, 가난한 시골 마을의 삶은 그저 팍팍하기만 하다. 집단 농장의 땅은 주민들에게 다시 나누어졌다. 땅에 의지해서 사는 주민들은 매일 들판에서 고된 노동의 시간을 보낸다. 감자, 토마토, 옥수수, 생선 튀김... 식탁에 차려진 식재료들은 그곳의 자연에서 주민들이 힘겹게 얻은 것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먹고 살 수 있다. 텃밭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근처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오미 우만은 Legedzine의 풍광을 결코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마치 민속지학자처럼 우크라이나 시골 마을의 많은 것들을 정밀하게 담는다. 중간중간 들어간 해설 자막은 이 마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농작물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외래 유입종 해충을 설명할 때에는 벌레를 자세히 비춰주며 뭉그러뜨려 보기도 한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초등학교의 영어 수업 시간은 꽤 흥미롭다. 그 아이들에게 영어는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 교사를 따라 영어 문장을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얼어붙은 강가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벽돌 공장의 노동자들, 시골 장터의 시끌벅적한 모습... 나오미 우만은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도 놓치지 않고 담는다. 우유를 짜는 여인의 옆에 있는 작은 고양이, 마당에서 늘어지게 하품하는 개, 비를 맞는 염소도 나온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소리들이 풍경 속에 흐르도록 놓아둔다. 벌들의 소리, 빗소리, 노동요, 지글지글 끓는 라디오 소리, 정신없이 우는 닭과 새소리도 들린다.

  그 모든 풍광에서 가난이 묻어나지만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느껴진다. 담뱃가루를 종이에 말아서 피우는 노인은 친구들과 들판에 천 한장 깔아놓고 카드 놀이를 한다. 여성 제작자는 마을의 나이든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친밀함과 유대감을 표시한다. 피클 제조법을 알려주는 할머니의 강의는 사뭇 진지하다. 작은 술잔을 부딪히며 서로 즐거워하는 할머니들의 식탁을 찍은 장면에서 관객은 마치 그곳에 초대된, 아니 주민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Unnamed Film'은 단순히 나오미 우만의 Legedzine 체류의 결과물이 아니다. 자신의 근원에 대한 탐구심은 그곳 마을 사람들의 심성, 삶과 공명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그곳에서 보낸 세월은 감독에게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자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말미에 나오미 우만은 우크라이나어 사전의 단어들을 시처럼 낭독한다. 낯선 외지인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편안하게 머물도록 도와준 마을 주민들은 어떤 면에서 이 다큐의 공동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감독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엔딩 크레딧에 마을 주민들의 이름을 올렸다. 이토록 정겹고 아름다운 마을은 지금 전쟁의 포화 속에 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하루빨리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사진 출처: lightindustry.org



**이 다큐는 lecinemaclub.com에서 이번 주 동안 무료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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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을 다룬 두 편의 최신작:

Petite Maman(2021), Céline Sciamma
C'mon C'mon (2021), Mike Mills



  Céline Sciamma의 2021년작 'Petite Maman(2021)'에는 아픈 엄마를 걱정하는 어린 딸이 나온다. 꿈과 같은 환상 속에서 8살 넬리는 자신과 같은 또래가 된 엄마를 만난다. 이 영화는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다. 넬리는 '작아진 엄마' 마리온과 우정을 쌓아간다. 영화는 나름 소박한 감동을 주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영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왜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가... 넬리의 아버지는 배경처럼 자리할 뿐이다. 넬리가 방문한 마리온의 집에는 남자가 없다. 마리온의 아버지, 그러니까 넬리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지워져 있다.

  'Petite Maman(2021)'에 감독 셀린 시아마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동성애자 감독의 주요한 관심사가 여성의 서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넬리는 할머니를 여읜 엄마의 상심을 위로하고자 애쓴다. 이 꼬마 아이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속이 깊다. 관객은 모친의 죽음이 넬리의 엄마가 지닌 내면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넬리에게 그런 엄마를 보는 일은 익숙했고,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돕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넬리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싶다. 그런 넬리의 바람은 어린 아이가 된 엄마, 마리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넬리가 마리온과 보낸 짧은 우정의 여정에서 넬리는 엄마의 우울과 불안의 근원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앓았던 병, 아버지의 부재... 그렇게 딸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얻는다. 귀엽고 사랑스런 넬리의 환상 여행은 많은 딸들이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법하다. 우리 엄마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Petite Maman(2021)'은 바로 그 궁금증에 대해 셀린 시아마가 펼친 상상의 나래이다. 영화는 페미니즘 서사를 판타지 장르에 녹여낸다.

  딸에게 있어 엄마의 존재가 좀 더 살갑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병풍처럼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넬리의 아버지, 삭제된 할아버지의 존재는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시경(詩經)'의 이 오래된 문장은 오늘날 성차별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존재이다. 그와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셀린 시아마는 여성의 삶에서 어머니가 갖는 비중과 그 의미를 극대화한다. 영화는 마리온의 엄마(넬리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마리온, 넬리로 이어지는 모계 혈통의 영속성과 끈끈함을 강조한다.

  'C'mon C'mon (2021)'의 Mike Mills도 자신이 발견한 모성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라디오 저널리스트 조니(호아킨 피닉스 분)는 여동생 비브와 소원한 사이이다. 둘은 생전에 치매로 고생했던 모친을 보살피는 문제를 두고 극심하게 대립한 적이 있다. 비브는 조니에게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을 보살피는 동안 아들 제시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조카 돌보미가 된 조니, 하지만 비브의 체류는 길어지고 조니는 제시를 보살피는 일과 해야할 직장일 사이에서 압박감을 느낀다. 전국을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조니는 제시와 여정을 함께 하기로 하는데...

  이 영화에서 극명한 변화를 보여주는 캐릭터는 '조니'이다. 독신남인 조니는 양육의 경험이 없다. 그런 조니에게 제시를 보살피는 일은 마치 부성(父性) 획득 퀘스트 같은 느낌을 준다. 감독 마이크 밀즈는 결혼과 양육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 영화에 강하게 투영한다. 자기 중심적이고 다소 권위적인 면모도 있었던 조니는 제시와 함께 한 시간을 통해 '아버지됨'이 무엇인가를 학습하고 체득해 나간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것은 보살핌의 모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조니의 여동생 비브가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비춰준다. 치매 어머니의 간병을 두고 비브는 조니와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 남매 사이에 어떤 언쟁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이 장면의 사운드는 소거되어 들리지 않는다). 정신 질환을 가진 남편을 책임감 있게 보살피는 비브라면 아마도 어머니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비브는 자신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브가 사적 영역에서 수행하는 이러한 '보살핌'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졌다. 오늘날, 그것이 국가와 자본주의의 영역으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많은 여성들은 거기에 매여있다. 

  마이크 밀즈는 비브가 보여주는 그러한 노력과 희생을 모성성으로 치환하며 찬미한다. 조니의 미성숙함은 그러한 가치들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머니는 위대하며, 아이들이야말로 어른의 스승이다'를 영화는 시종일관 부르짖는다. 제멋대로인 꼬마 제시는 조니의 인생 학습을 돕는 선생님인 셈이다. 자기만 알던 독신남은 그렇게 인간이 되어간다... 조니는 감독의 분신인가? 이러한 작위적인 설정과 자의식 과잉의 캐릭터는 극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실제 아이들의 인터뷰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했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진정성에 기여하는지는 의문이다.

  셀린 시아마는 'Petite Maman'에서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한 인간의 삶을 구동시키는 절대적인 원리가 된다. 마이크 밀즈의 'C'mon C'mon'은 여성의 모성이 가지는 가치를 관계 중심성으로만 한정짓는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보살피는 것. 그것을 위해 여성이 감내하고 치루어야 하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설익은 이해를 보여줄 뿐이다. 최신작인 두 편의 영화는 모두 '모성'을 다루었지만, 절제와 균형 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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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자매는 도로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은 참 배달이 발달했어... 저 멀리 도로에 서있는 쿠* 배송 트럭이 보인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내다 잠깐 한국에 들어온 상옥(이혜영 분)은 고국의 모든 것이 낯설다. 좀 트였다 싶은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동생 정옥은 미국보다 한국이 살기 좋다며 아파트 하나 사서 여기서 살자고 말한다. 동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입주 때보다 2억이나 올랐다며 신나한다. 말 나온 김에 근처 아파트 공사 현장까지 둘러보자고 한다. 상옥이 보기에는 엄청 비싼 아파트, 여기 사람들은 참 돈도 많아...

  홍상수의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는 중년의 은퇴 여배우 상옥의 하루를 따라간다. 이런 구성은 홍의 2011년작 '북촌 방향(The Day He Arrives, 2011)'과 유사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영화 감독 성준(유준상 분)은 아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온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는 거다' 성준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며 그렇게 다짐한다. 과연 성준은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당신 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수시로 경건한 기도문을 읊조린다. 과거와 내일은 없으며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미 와있습니다. 미래의 악몽에서 구해주시고, 항상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 마치 신앙고백같은 상옥의 말들은 자연스럽다기보다 의지적인 다짐으로 들린다.

  '북촌 방향'의 성준이 영호 형(김상중 분)과 만나서 '소주'를 마신다면, 상옥은 영화 감독 재원과 '배갈'을 들이킨다. 술이 들어가면서 홍의 인물들의 속내와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옥의 감사 기도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옥은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재원의 부탁을 거절한다.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제, 상옥의 여정이 명확히 이해된다. 약속 장소인 인사동으로 가기 전에 상옥은 이태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을 둘러본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죽을 때가 되면 누구든 고향을 그리게 된다. 동생과 조카를 만나고,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보고...

  상옥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듯, 성준도 이전에 서울에서 지내던 자신의 행적을 복기한다. 지저분하게 끝난 연애, 출연료 아끼려고 치사하게 지인 배우를 내친 일... 상옥과 성준은 마치 영혼의 쌍둥이 같다. 성준은 술 마시다 말고 피아노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다. 상옥도 취기가 올라오자, 기타로 바흐의 미뉴엣을 연주한다. 성준이 술자리에서 설파하는 개똥 철학은 자못 진지하다. 우연과 확률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현실이 놀랍고 신기하지 않냐고 침을 튀겨가며 떠든다. 그런가 하면, 상옥은 생판 처음 본 감독에게 17살 때 죽으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때 서울역 광장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고. 얼굴 앞의 세상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거기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 '당신 얼굴 앞에서'는 상옥의 그 말에서 나왔다.

  상옥에게 배우란 직업은 잘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단서는 작은 다리 밑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상옥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이 내성적인 여성은 돈을 벌고 모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동생 정옥은 언니가 미국 생활 동안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상옥은 미국에서 Liquor Store를 했던 이유를 들려준다. 큰돈을 벌지 못해도 단골 손님만 있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에 무심한, 그렇게 사람에게도 무관심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피붙이인 정옥과도 소식을 끊은 채 살았다. 정옥은 어떻게 그동안 연락도 안하고 살 수 있었냐고 상옥에게 분을 터뜨린다. 그런 상옥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 남은 시간 동안 현재에 충실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자, 고 결심한다. 자신에게 지갑을 선물한 조카의 마음, 길 가다 사진을 찍어준 여성의 친절, 손님에게 열쇠를 맡긴 술집 주인의 신뢰와 배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옥은 처음 만난 재원에게도 순수하게 대하며, 그의 지분거림도 깔끔하게 받아넘긴다.

  전날의 숙취가 아직 남아있는 아침, 재원의 음성 메시지에 상옥은 잠이 깬다. 재원은 상옥에게 당장 지방에 가서 단편이라도 찍자고 약속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미안하다고, 행복하시라고 말을 남긴다. 상옥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상옥의 발작적인 웃음은 경박스럽고 위선적인 인간, 부박한 삶에 대한 경멸과 조소처럼 보인다. 성준의 북촌 체류기가 원래의 다짐을 비켜가듯, 상옥의 한국 체류기도 그렇게 감사의 기도문에서 멀어진다. 

  젊은 감독은 나이든 중년의 여배우로, 피아노는 기타로, 북촌은 이태원과 인사동으로, 우연의 현실은 얼굴 앞의 천국으로 바뀌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홍상수가 지나온 10년의 세월을 그렇게 품는다. 이제 그의 나이는 병고와 죽음을 좀 더 많이 생각할 때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누그러진 홍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이 홍상수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홍의 영화는 '따뜻함'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보여준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 '나이듦'은 영화가 가진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젊은 시절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지켜봐왔던, 함께 나이들어가는 그의 관객들에게 '당신 얼굴 앞에서'는 느긋한 쉼표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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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이혼은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이루어졌다. 영화 제작자였던 여배우의 남편은 곧 다른 여배우와 결혼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에도 재능이 있었던 여배우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제작과 시나리오는 전남편이, 주연은 전남편과 재혼한 여배우가 맡았다. 'The Bigamist(1953)'은 정말 특이한 영화이다. 뭔가 한자리에 있어도 껄끄러울 것 같은 세 사람이 같이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Ida Lupino, 전남편은 Collier Young, 전남편과 결혼한 이는 Joan Fontaine이다. 영화는 '중혼자(重婚者)'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아내를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줄거리이다. Ida Lupino는 연출도 하고 연기도 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필리스 역을 맡았다.

  냉장고 판매 사업을 하는 해리와 아내 이브는 입양을 결정한다. 이브는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다. 입양 기관의 조사 담당관 조단은 해리에게서 미심쩍은 느낌을 받는다. 해리의 주변을 탐문하던 조단은 LA로 출장을 간 해리가 아기와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단이 중혼죄로 경찰에 신고하려던 순간, 해리가 이를 말린다. 해리가 조단에게 털어놓는 과거는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이 남자는 어쩌다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두게 된 것일까...

  이 영화에서 해리 역을 맡은 배우 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은 미남 배우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배우 생활 내내 체중 조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뭐랄까, 후덕한 인상의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이다. 그런 그가 연기하는 '해리'라는 인물은 아내를 사랑하며, 결혼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쓴다. 아내 이브는 해리의 일을 돕게 된 이후로 오히려 사업에 매진하고, 그런 아내에게서 해리는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우연히 LA에서 알게된 필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해리가 필리스와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라면 불륜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여자와 공모해서 아내를 죽이려는 이야기로 나아갈 법도 하다. Douglas Sirk'Sleep, My Love(1948)'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가스등(Gaslight, 1944)'의 변형된 서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부유한 상속녀 아내를 죽이려는 남자가 나온다. 매혹적인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남자는 아내에게 공포의 기억과 불안을 주입시켜서 자살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이 사악한 남편의 살해 시도는 너무나도 필사적이다. 그와는 달리 'The Bigamist'의 해리는 책임감 있는 선량한 남자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브와 필리스를 모두 사랑한다. 이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혼한 남자가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가? 다소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불륜'이란 소재를 아이다 루피노는 아주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다룬다. 당시 미국 영화의 자체 검열 기준인 'Hays Code'에 따르면 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이야기는 암묵적인 금지에 해당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에 나름의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불임인 이브는 입양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해리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필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필리스는 아이를 가졌지만 유부남인 해리에게 그 어떤 책임이나 부담감을 지우지 않는다. 결국 해리는 'bigamist', 중혼자의 처지가 된다.

  당시 미국에서 '중혼죄'는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회 문제였다. 아이다 루피노가 그러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자신의 영화로 만들기로 한 데에는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루피노는 중혼자들을 단순히 매도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에, 내밀한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영화 속의 '해리'가 보여주듯, 착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중혼의 그물에 갇힐 수도 있다. 관객은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기이한 딜레마에 빠진다.

  루피노의 전남편 콜리어 영이 쓴 시나리오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 부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그는 영화 속 바람난 남편의 아내인 이브의 처지와도 같았겠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이다 루피노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 무렵에 그가 이미 조안 폰테인과 연애 중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이혼한 다음해에 폰테인과 재혼했다. 영화는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마지막처럼 법정 장면에서 끝난다. 아내와 필리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해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슬픔과 고통, 수치심을 안겨주는 결과에 이른다. 'The Bigamist'는 불륜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죄악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다 루피노의 관심사는 윤리적인 판단이나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의 파장에 있다.

  나는 비참하고 길을 잃은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죠. 


(She wanted to do films “with poor, bewildered people,” she once said, according to the New York Times. “Because that’s what we are.” - 인용문 출처 vanityfair.com)


  'bewildered'는 보통 '당혹스러운'이란 의미로 쓰인다. 또 다른 의미로 이 단어는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상처입은'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아이다 루피노는 동시대 영화가 외면했던 주변부 사람들을 자신의 영화에 내세웠다. 대표작 'Outrage(1950)'는 강간 피해자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Never Fear(1950)'는 소아마비를 이겨낸 여성 댄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영화는 배우 생활 중에 소아마비에 걸려 투병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Hard, Fast and Beautiful(1951)'에서는 착취적인 엄마에 시달리는 테니스 스타를, 'Not Wanted(1949)'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인 미혼모 문제를 다루었다. 루피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상처입었으며 어디로 갈지 몰라 길 위에 서있다. 영화 'The Bigamist'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한 내면을 성찰한다. 

 
*사진 출처: cultfilmalley.com.au       아이다 루피노와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영화 'The Bigamist(1953)' 촬영장의 세 사람. 좌측부터 순서대로 조안 폰테인, 콜리어 영, 아이다 루피노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주연의 영화 'D.O.A.(195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somewhere-in-night1946-doa1950-no-w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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