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발뒤꿈치가 아픈지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발이 아프기는 했는데, 그래도 집 안에서 걸어 다닐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족저근막염'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했다. 그건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좀 쉬면 낫는다고 알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가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서 편한 비치 샌들을 신으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발은 계속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최근에는 맨발로는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대로 된 진단이라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합 병원 정형외과의 족부 전문의를 찾아갔다. 그게 지난주의 일이다. 의사 선생은 40대 초반의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 동안 아팠는지, 어떻게 아픈지, 하루 얼마나 걷는지, 의사는 병력 청취를 꼼꼼히 했다. 발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갈 때는 평소 자신이 얼마나 걷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땐 만보계가 도움이 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의사는 발을 좀 보겠다고 했다. 나한테 아픈 부위를 눌러 보라고 하고는, 내가 아프다고 말한 뒤꿈치를 살짝 만져보았다.

  "족저근막염입니다. 근막의 두께도 괜찮아 보이니까, 일단 약을 좀 써보죠."

  이 의사 선생은 분명 명의가 틀림없다.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찍지 않았다. 진단을 위해 추가적인 검사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족저근막염은 낫는 데에 1년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좀 심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비급여 치료이고 환자마다 효과가 달라서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발 마사지와 족욕을 하고, 쿠션이 있는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서 지내보라고 당부했다. 나는 좋은 의사 선생이 처방해 준 소염진통제를 2주분 받아왔다.

  약을 먹어서 그런가, 발의 통증이 빠르게 나아진 듯 했다. 어제는 모처럼 날이 좋아서 정말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왔다. 그런데 웬걸, 귀신같이 발이 다시 아프다. 결국 족저근막염은 쉬는 게 답이구나 싶었다. 발이 아파서 걷질 못하니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발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는 낫기 위해서 뭔가를 꾸준히 하지는 않았다. 족저근막염이 나으려면 아킬레스건 스트레칭을 하고, 발 마사지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안 했다. 글을 쓸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발에다 테니스공을 놓고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다. 나는 아픈 발을 위해서 '격렬하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발이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

  뭔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렵지만 시작하고 계속 해 보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인생에서 그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픈 발이 낫는 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쥐어짜 내는 것, 글을 써 내려가는 것. 몸은 피곤하고,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석 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시 습작을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 시 쓰기가 나름 재미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힘든 일상의 숨구멍 같기도 했다. 나는 '시'가 가진 근원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과 사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를 통해 해나가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디에다가 응모하려고 쓴 시도 아니었다. 다만 삶을 더 잘 견디는 방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좋았다. 아이쿠, 족저근막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렇게 시로 마무리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러하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시를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느낀 평온함을 이 글의 독자들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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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수 2024-03-24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나으시길바랄께요 시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푸른별 2024-03-24 22:47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봄이야


매일 머리를 감는데도
머리가 가려워
어디서 들으니
그건 머리가 빠지려고
그런 거래

온몸이 중력을 느껴
피부도 잇몸도 땅을
향해 천천히 늘어지지
늘어진 게 편한 건
옷뿐이야

주말 저녁에는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놔
거길 가보고 싶지 않아
그걸로 충분해
아픈 몸은 진통제에
절여졌지

구멍 난 흰색 양말을
초록색 실로 꿰매었어
흰색 실은 오래전부터
없었거든 반짇고리엔
검은색 실과
초록색 실만

초록색으로 꿰맨 양말을
신고 천천히 걸어봐
놀이터에서 소리를
지르는 계집애들
저린 왼쪽 팔로
불안이 타올라
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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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까치


길을 걷다가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신과
부딪혔습니다
당신, 괜찮은가요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군요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났습니다
어쩜 저렇게
멀쩡히 걸어갈 수
있을까요
신기하네요
당신도 좀 아팠으면
좋겠는데

얼굴만 보면
소년인데
당신의 흰 머리카락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머리카락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화단에
봄까치 한 쌍
둥지 지을 나뭇가지
입에 물고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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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미망인 숙희(최은희 분)에게는 대학생 딸 경희(엄앵란 분)가 있습니다. 둘은 얼핏 보기엔 엄마와 딸 사이라기 보다는, 자매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비껴간 것처럼 보이는 고운 외모의 미망인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네, '돈'입니다. 숙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큰 빚을 지고 가게를 정리한 상태이지요. 그런 숙희에게 출판사 전무 상규(김진규 분)는 숙희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돈을 빌려줍니다. 어려운 때에 자신을 도와준 상규에게 숙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랑의 감정이겠지요. 그건 상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규도 숙희를 나름 연모하는 것처럼 보여요. 상규와 숙희,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영화 '동심초(Dongsimcho, 1959)'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에는 잘 언급되지 않는듯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1959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더군요(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r.kr).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동심초'에는 결코 낡지 않은 주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그렇다면 숙희와 상규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숙희의 처지를 좀 살펴보죠. 숙희의 큰 문제는 '돈'이에요. 숙희는 상규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 돈은 그냥 받은 돈이 아닙니다. 갚아야 할 돈이지요. 물론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상규는 숙희에게 빚 독촉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숙희가 상규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어찌 보면 좀 통속적이지 않나요? 사랑이란 감정이 '돈'이 가진 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돈'은 중요한 내러티브적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상규가 숙희에게 빌려준 그 돈은 그의 사업자금입니다. 그는 이 사장과 함께 투자해서 출판사를 세웠습니다. 이 사장은 상규를 사윗감으로 보고 투자한 거예요. 상규는 사장 딸 옥주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사장과 상규가 그런 사이라 해도 상규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숙희에게서 돈을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상규의 마음은 옥주 보다는 숙희에게로 향해있습니다. 그런 상규는 숙희에게 빚 갚으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규의 누나(주증녀 분) 김 여사는 속이 타들어 갑니다. 김 여사는 독신으로 남동생 하나 바라보며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어떤 면에서 김 여사에게 있어 상규는 아들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 남동생이 애 딸린 과부에게 눈이 돌아갔으니, 그 누나 심정이 어쩌겠어요? 더군다나 김 여사와 숙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에요. 김 여사는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동생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든 동생과 숙희를 떼어놓고 싶죠. 남동생은 번듯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야만 하니까요. 김 여사는 숙희에게 빚 독촉을 하면서 에둘러 숙희가 상규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비난합니다.

  그럼, 상규의 약혼녀 옥주(도금봉 분)의 입장을 살펴볼까요? 옥주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습니다.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죠. 그런데 옥주는 그 남자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과년한 딸이 있는 미망인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저런 여자를 왜 좋아하나 생각하면 속도 상하고 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옥주가 상규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 보여요. 사랑이 어디 마음대로 되냔 말이죠. 상규는 집안의 재력으로 자신에게 어설프게 묶어놓은 상태일 뿐입니다. 옥주는 궁리 끝에 숙희를 찾아가지만, 별 말도 못 하고 돌아오지요. 옥주는 돈으로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숙희의 딸 경희도 '돈' 때문에 고민합니다. 엄마의 양장점이 망하면서 경희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경희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엄마는 살고 있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경희는 딱히 머물 곳도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희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돈이 많다면 엄마의 빚도 갚아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희가 그런 기대를 하고 만난 남자는 겉멋 든 바람둥이일 뿐입니다. 경희는 '돈'만 보고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죠.
   
  이 영화에서 돈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부산의 종이 무역상으로 나오는 김 사장(김승호 분)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숙희에게 반합니다. 김 사장은 숙희를 아는 상규에게 숙희와 잘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하죠. 상규에게 김 사장은 사업상 중요한 고객입니다. 애 딸린 홀아비이기는 하지만 김 사장에게는 숙희와 잘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옵니다. 숙희는 그렇게 돈의 힘을 앞세우는 김 사장을 역겹게 생각합니다. 숙희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감정이니까요.

  이렇게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돈에 얽혀 이리저리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돈'을 빌려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숙희와 상규의 사랑은 결국 '돈'을 갚으면서 끝나버립니다. 상규는 숙희를 간절히 원하지만, 숙희는 상규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접습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상규에게 빚을 갚고, 시골 친정집으로 떠나버리죠. 영화 '동심초'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비탄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흐르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곰곰이 톺아보면, 그것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사랑'이란 감정은 현실이 배제된 진공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 숙희와 상규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기는 해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 사랑도 인생의 많은 것들처럼 진정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죠. 거기에는 돈과 계층, 사회적 관습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작동하고 있어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결국 이별을 택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숙희는 부산 출장을 가는 상규를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갑니다. 하지만 숙희는 역사(驛舍)의 쇠창살 옆을 서성이다 그냥 돌아오지요. 영화의 마지막, 상규는 시골로 떠나는 숙희를 보고자 서울역에 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상규 또한 숙희가 예전에 머물렀던 쇠창살에 고통스럽게 매달립니다. 이 기이한 수미상관(首尾相關)은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둘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화려한 비탄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내게 흥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은 숙희의 딸 경희의 미래입니다. 숙희는 친정집으로 내려가면서 딸 경희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줍니다. 예전 경희의 과외 교사 기철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이었습니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아들)을 따라야 했지요. 숙희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따라야할 자식이 없는 셈입니다. 숙희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면서, 딸에게는 미래의 사윗감을 정해준 것처럼 보이지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뿌리가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더 지난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사랑과 결혼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진 출처: kmdb.or.kr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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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의 시


요점은 그거야
트렌드를 읽으라고
홍대 클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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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방구석에서
시어 붙잡고 비늘
떼어 다듬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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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야 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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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당선이 되어야
글로 밥벌이를 하지

트렌드 따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같은 머저리들이
널려있으니까
서점의 서가에
바보들의 시집이
넘쳐나는 거야

경계를 탐험하며
절망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써야지

백날 그래봐라
골목길 외등 아래
추레한 차림으로
서있는 거지의 외침을
누가 들어주니

트렌드를 따라
중심으로 들어가라고
그게 능력이고
진짜 시야

싸구려 커피에
배를 곯는
무직, 시인은
분을 씹으며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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