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온다. 남자의 오랜 친구 마렉이다. 그는 휴가를 보내러 이 외딴 시골 마을의 친구를 찾았다. 한때 촉망받는 물리학자로 함께 연구소에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얀은 시골 기상 관측소 일을, 마렉은 하버드에서도 공부하고 아주 잘 나가는 학자가 되었다. 마렉은 재능있는 친구가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렇게 얀과 그의 아내 안나의 시골 마을 일상에 마렉이 들어온다.

  폴란드의 감독 Krzysztof Zanussi의 데뷔작 '수정의 구조(Struktura kryształu, 1969)'는 제목만 본다면 무슨 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화같다. 74분의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이 흑백 영화는 의외로 매우 명쾌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마렉은 관찰자로서 친구 얀의 시골 생활을 들여다 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 팔씨름, 썰매 타기... 둘은 곧 떨어져 있었던 5년의 시간을 메꾸며 친밀감을 회복한다. 하지만 마렉이 보기에 얀의 삶은 지루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다.

  "넌 낭비하고 있어. 재능과 너 자신을."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렉에게 얀과 안나 부부의 삶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마렉은 부부 침실의 열려진 문으로 안나가 얀에게 베개를 던지며 장난을 거는 것을 본다. 이혼한 마렉에게 부부의 친밀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활달한 안나는 마렉과도 곧 친해진다. 그들 세 사람이 일상을 함께 하며 지내는 모습에서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과 짐(Jules et Jim(1962)'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관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 태도의 차이를 대비시킨다.

  미국에서 지내다 온 마렉은 얀에게 최신식 자동차와 멋진 여자 모델이 등장하는 잡지를 보여준다. 얀은 그것들을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고 평을 한다. 얀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연을 벗삼아 지낸다. 별다른 욕심이 없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삶. 마렉은 얀에게 재능을 발휘하며 성취하는 삶이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떠본다. 그렇다. 그가 이 시골 마을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렉이 일하는 연구소의 소장은 얀을 다시 불러서 함께 일하고자 한다. 마렉은 얀을 설득해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

  얀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제공될 것이며 높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얀은 그 제안을 거부한다. 마렉은 그런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렉은 얀이 쓸모없는 램프 장난감을 만드는 걸 한심하게 여긴다. 얀이 술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 마렉의 눈에 비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죄다 무지렁이 시골 농부일 뿐이다. 뛰어난 머리를 가졌으면 그것을 활용해서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하고, 부와 명예를 쌓아야 마땅하다. 마렉은 그런 신념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얀은 마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바라본다. 충만함, 평화, 자유, 사랑과 같은 것들...

  안나는 마렉에게 얀이 산에서 큰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그것이 얀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마렉은 얀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실패한다. 영화 '수정의 구조'에서 마렉이 얀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와도 닮아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기(reflection)'. 물론 응시와 성찰만으로 삶에서 근원적인 변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마렉은 자신이 질주해온 설원의 길을 다시금 방향을 돌이켜 떠난다. 두 친구의 서로 다른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지평선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지평을 응시하는 그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크지스토프 자누시는 그렇게 자신의 소박한 데뷔작에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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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패전은 일본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1950)'를 보고 있노라면, 그 즈음의 일본이 서서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郎)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발표한 단편 소설 40편을 묶어서 4권의 책으로 펴냈다. 소설에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골 마을의 선생 이시나카가 나온다. 주인공 이시나카 선생은 아오모리현(青森県)의 농촌 마을에 살면서 자신이 듣고 경험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꽤 인기가 있어서 1950년에 신도호(新東宝)에서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 영화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마을의 과수원이다. 마을 청년은 패전이 임박한 시기에 자신이 과수원 땅에 군부대의 석유 드럼통을 묻어놓았노라고 말한다. 석유값이 올라 귀하게 취급되는 시기에 그것을 발견한다면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다. 이시나카 선생, 마을의 램프 가게 주인이 청년과 함께 과수원에서 드럼통 발굴에 나선다. 그러나 청년의 기억은 불확실하고, 그 넓은 과수원을 다 헤집어 놓는 것도 어렵다. 곧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속셈이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과수원 주인의 딸에게 반한 청년이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찾아보려고 나름의 꾀를 낸 것.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과수원집 처녀와 마을 청년은 결혼을 약속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농촌 마을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순박한 삶이다. 피폐해진 전후의 경제 상황에서도 농부들은 땅에 의지해서 삶을 재건해 나갈 수 있었다. 일종의 향토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원작자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이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것도 그 지점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웃음이 필요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힘든 시절이지만 영화 속 농촌 마을 사람들은 찌들려 있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거짓말을 눈감아 주며, 청년과 과수원집 딸의 앞날을 축복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서점 주인 야마다와 손님 키하라는 선정적인 무희들의 공연을 보러 간다. 야마다의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남자 친구를 불러 함께 아버지를 골려주고 싶어한다. 남자 친구는 아버지와 동행한 손님 키하라의 아들이다. 딸은 공연을 보고 나오는 아버지에게 누가 먼저 보자고 한 것이냐고 캐묻는다. 야마다와 키하라가 서로를 탓하는 가운데 두 연인도 각자의 아버지 편을 든다. 자식의 연애를 망치고 싶지 않은 아버지들은 이시나카 선생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무희들의 춤 공연을 꽤 비중있게 담는다. 그곳에 모인, 대개는 중년의 남자들은 호기심과 욕망의 눈빛으로 무희들의 몸을 응시한다. 그 장면은 일본인들이 이제 먹고 사는 문제의 절박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나선다. 서점 주인과 손님은 다소 남사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공연을 보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질책하지만, 이시나카 선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그 욕망을 옹호한다. 변화하는 일본인의 성의식은 새로운 세대의 개방성과 솔직함으로 이어진다. 언쟁으로 멀어졌던 두 연인은 사랑의 감정을 되새기며 화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배우의 길에 막 들어선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농부를 연기한다. 병원에 입원한 언니를 간호하러 간 철부지 아가씨 요시코는 병원 환자가 봐주는 손금 해석을 듣는다. 조만간 배필을 만나 결혼할 거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 마을 청년 나가사와의 건초 마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요시코. 청년의 집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여 들뜬 분위기가 된다. 마을 마츠리 행사에서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가 떠나기 전에 경찰을 부르는데...

  아마도 세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가장 기이하게 비춰질 것이다. 나가사와의 어머니가 경찰을 부른 이유는 요시코의 '처녀성(virginity)'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혼기를 앞둔 아가씨가 외박을 한다는 것은 정조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를 자신이 잘 보호했다는 사실을 공권력에 기대어 인정받고자 한다. 요시코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찰은 동행한 이시나카 선생에게 요시코의 처녀성이 손상되지 않았음을 간결하게 기술하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뜨악하게 느껴지는 이 에피소드에서 여성의 몸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영역에 자리한다. 순결하고 건강한 여성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자격을 얻는다. 경찰은 요시코의 몸을 훑어보며 처녀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여성은 새로운 세대를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군국주의의 끈질긴 망령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삶과 내면을 옭아맨다.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에는 그렇게 전후 일본의 서늘하고도 일그러진 이면이 포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루세 미키오는 변화하는 젊은 세대의 사랑 이야기 속에 웃음과 희망을 포개어 놓는다. 흥행에도 성공한 이 영화에는 패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강렬한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산의 소리(山の音, 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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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미래를 생각한다면 엄마가 여기 있는 편이 훨씬 낫겠죠."

  델리리스의 9살 된 어린 딸 키키는 감옥에 있는 엄마를 면회하고 나오면서 그렇게 말한다. 도대체 소녀의 엄마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84년, 다큐멘터리 제작자 Jon Alpert는 New Jersey의 Newark 거리에서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알게 된다. 롭과 프레디는 친구 사이였고, 델리리스는 롭의 여자 친구였다. 앨퍼트의 카메라는 1년 동안 절도와 마약 밀매에 가담한 세 사람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다큐가 'One Year in A Life of Crime(1989)'이었다. 다큐의 후일담도 나왔다. 'Life of Crime 2(1998)'가 그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어져서 이제 완결판 다큐인 'Life Of Crime 1984-2020(2021)'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무려 36년 동안의 시간이 담겨 있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범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롭과 프레디를 만나게 된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그들에게 생계이며 일상이다. 훔친 물건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마약 밀매도 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약 중독자의 길에 들어선다. 롭의 여자 친구 델리리스 또한 마약 중독의 늪에 빠져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했던 델리리스는 중독자가 되면서 삶이 추락했다. 세 아이의 엄마인 델리리스는 매춘과 마약 판매로 중독자의 삶을 이어간다.

  존 앨퍼트가 보여주는 범죄의 초상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마치 착취 다큐멘터리 같다. 그의 카메라는 롭과 프레디의 절도 행각을 비롯해 마약을 주사하는 장면도 그대로 다 담는다. 앨퍼트는 처음에는 냉철한 관찰자로서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앨퍼트 사이에는 인간적인 유대가 쌓였다.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는 자신들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앨퍼트는 진심 어린 조언도 한다. 제작자와 촬영 대상자 사이에 그런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다큐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촬영된 낡고 거친 화면 속의 젊은 세 사람은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다. 롭은 사회적 낙인을 이겨내고 일자리를 얻어 일반인의 삶에 안착하려고 애쓴다. 프레디는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 HIV 양성 판정을 받고 에이즈 환자가 된 그에게 감옥 밖의 삶은 버겁기만 하다. 델리리스도 착실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중독의 수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린 딸 키키는 엄마의 삶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다큐는 체포와 수감, 실패한 재활과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어떤 면에서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의 처절한 삶의 여정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맞닿아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마약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레이건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단속과 강력한 처벌로 대응했다. 거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형량과 인종 차별적인 편향성이라는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 다큐에 나오는 세 명의 인물들 가운데 롭은 백인, 프레디와 델리리스는 히스패닉이다. 그들이 수감된 감옥을 비춰주는 장면에서 수형자들 대부분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이다. 미국 사회에서 범죄와 인종 문제는 뿌리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마약 범죄자들을 단지 감옥에 넣는 것만으로 마약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큐는 세 친구의 험난한, 그리고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 재활의 여정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따라간다. 롭과 프레디는 결국 마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오직 델리리스만이 신앙과 의지력으로 13년 동안 마약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 COVID-19으로 사회 복지 서비스가 축소된 상황에서 델리리스는 단 한 번의 마약 복용으로 죽음에 이른다. 델리리스의 삶은 '중독'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하는 힘든 투쟁임을 보여준다.

  다큐의 마지막, 앨퍼트는 촬영을 시작한 1984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의 약물 중독 사망자수가 500만 명이라고 알려준다. 'Life Of Crime 1984-2020'은 어느 범죄의 응축된 연대기인 동시에, 다큐 제작자의 36년에 걸친 집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마약 문제, 중독자들의 재활 지원 정책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도 포개어져 있다. 영국의 다큐 제작자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Up series'는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계층의 어린 아이들이 중년에 이르는 삶을 담아냈다. 계층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앱티드의 다큐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존 앨퍼트는 범죄와 삶,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초상을 그려낸다.  



*사진 출처: daily-journal.com



**마이애미 마약왕들의 범죄를 다룬 다큐,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cocaine-cowboys-kings-of-miami-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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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영화의 주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문예 영화였다. 그 시기에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수준 높은 영화들이 꽤 많이 제작되었다. 주인공들은 대개 여성들, 그 가운데 '게이샤(芸者)'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띈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6년작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도 게이샤가 주인공이다. 원작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의 1961년작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에는 '코엔'이란 이름의 게이샤가 나온다. 토미타 츠네오(富田常雄)가 쓴 '코엔의 일기(小えん日記, 1959)'가 원작이다.

  코엔(와카오 아야코 분)에게 남자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일상이다. 말이 좋아 '예인(예술을 아는 사람)'이지 게이샤들은 웃음을 파는 직업이었다. 코엔은 '마마짱'이 배정해주는 손님들을 받는다. 부유한 건축가, 초밥집 요리사, 증권가 브로커... 그곳 손님들의 직업과 연령대도 다양하다. 코엔은 술 마시고 노닥거리다 손님 받고, 그러다 손님들하고 만나 데이트 하고 여행도 간다. 그런 삶을 사는 코엔에게는 괴로움이라던가 심각함이 보이지 않는다.

  게이샤들이 모여서 사는 집에 코엔의 개인 공간이라고 해봐야 손님 받는 방이다. 그런데 코엔은 자신이 애지중지 하는 작은 화분을 그 방이 아니라, 게이샤들이 함께 머무는 거실 쪽에다 둔다. 동료 게이샤가 실수로 화분을 건드려 깨뜨리자 코엔은 살짝 화를 낸다. 그곳에는 사생활이라든가, 오롯한 고요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사(神社) 근처라서 수시로 신사에서 치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런 곳에 사는 코엔에게 드디어 자신의 집이 생긴다. 중년의 돈 많은 건축가는 코엔을 내연녀로 붙들어 두고 싶어한다.

  코엔이 얻은 셋방에서는 종소리 대신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폰서 영감은 코엔이 꾸며 놓은 집을 둘러보며 '하숙방'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과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그건 코엔에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코엔에게 진짜 '집'의 분위기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화류계로 흘러 들어와서 살게 된 삶. 이 천진난만한 게이샤에게는 욕심도, 괴로움도 없다.

  카와시마 유조는 게이샤의 삶을 손바닥의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느낌을 준다. 유흥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도 했던 감독에게 그쪽 세계의 삶을 묘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돈이 물처럼 흘러다니는 곳. 그런 세계에 살면서도 코엔에게는 순진한 구석이 있다. 스폰서 영감의 뜻대로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도 하고, 게이샤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래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나름의 소망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코엔의 주변 남자들은 그 기대에서 모두 벗어난다. 데이트했던 초밥집 요리사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며, 스폰서 영감은 갑작스런 병을 얻어 죽는다. 연모했던 대학생은 회사원이 되어, 외국인 손님 접대를 하러 나타난다.

  기차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에서 코엔은 부서졌던 화분의 식물을 다시 잘 키워낸다. 좀 인색하기는 해도 스폰서 영감은 친절했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코엔은 다시 '마마짱'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마마짱(ママちゃん)'은 어린 아이가 부르는 '엄마'라는 뜻도 있지만, 물장사 하는 술집 여주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코엔은 스폰서 영감을 '파파(パパ, 아빠)'로 불렀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관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친해진 십 대 청소년은 코엔을 '누나(姉さん)'라고 부른다. 코엔에게 그들은 마치 유사가족(類似家族) 같다. 하지만 마마짱은 매상을 위해 코엔이 내켜하지 않는 손님을 강권하는 포주일 뿐이다. 스폰서 영감 파파는 강퍅한 마누라에게 질려서 코엔의 젊음을 값싸게 사들여서 즐겼다. 남동생을 자처했던 녀석은 급기야 코엔을 여자로 보고 달려든다.

  스폰서 영감의 죽음에 상심한 코엔은 게이샤들의 거실에 작은 분향 제단을 세운다. 동료 게이샤는 그런 코엔에게 개인 공간이 아니라며 이죽거리고, 격분한 코엔은 몸싸움을 벌인다. 그렇다. 마마짱과 게이샤들은 코엔의 가족이 아니며, 그들과 함께 사는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코엔은 낯선 시골 마을의 역에 서있다. 젊고,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 뿐인 이 가난한 게이샤의 목적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카와시마 유조는 집을 찾아나서는 코엔의 여정에 쉽사리 희망의 빛을 드리우지 않는다. 코엔이 짓고 있는 희미한 웃음 속에는 막막함이 서려 있다.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는 그렇게 화류계 여인의 부박하고도 허망한 삶의 단면을 잡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토요타 시로 감독의 문예 영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猫と庄造と二人のをんな,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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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emme du boulanger, The Baker's Wife(1938)
La Fille du puisatier, The Well-Digger's Daughter(1940)



1. 제빵사의 아내, 마르셀 파뇰의 대표작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1986)''우물 파는 사내의 딸(La Fille du puisatier, 2011)',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리메이크 작품이다. 오리지널 영화를 만든 이는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1895-1974)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극작가로 시작했다. 연극에서 거둔 성공은 영화로 이어졌다. 무성 영화가 이제 막 유성 영화로 전환될 무렵에 파뇰은 자신의 작품들을 영화화하면서 영화계에 안착했다. 그의 1938년작 '제빵사의 아내(The Baker's Wife)'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행운은 '우물 파는 사내의 딸(1940)'로 이어졌다. 파뇰은 두 영화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희곡에서 갈고 닦은 그만의 유머러스한 문체는 영화에서도 돋보인다. 파뇰은 코미디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당대의 사회를 영화 속에 투영한다.

  '제빵사의 아내(1938)'는 지극히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시골 마을에 빵집을 연 제빵사 에마블레는 맛난 빵을 구워 마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그의 젊은 아내 오렐리가 양치기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다. 상심한 에마블레는 아내를 찾을 때까지 빵을 굽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빵 없이는 살 수 없는 마을 사람들, 급기야 마을 후작의 지휘하에 특별 수색대가 조직된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제빵사의 아내를 찾아올 수 있을까...

  에마블레가 빵집을 연 이 시골 마을은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마을의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한다. 교리에 충실한 마을 신부는 좌파주의 교사와 언쟁을 벌인다. 대대로 불화하는 두 집안의 농부는 서로 말하지 않는다. 마을 여자들은 뒷담화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후작은 자신의 성에 세 명의 애첩을 두고 지낸다. 그런 그들의 식탁에 에마블레의 빵이 올라간다. 그런데 그 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든 제빵사의 아내를 찾아야만 한다.
 
  마을 농민들은 후작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수색에 나선다. 이 마을은 계층적으로 명백히 구분되어 있다. 후작은 봉건 영주처럼 마을 주민 위에 군림한다. 그는 함께 사는 세 명의 여성을 조카라고 뻔뻔하게 둘러댄다. 신부는 후작을 질책하지만, 낡은 교회를 고쳐줄 수 있는 후작 앞에서는 약자나 다름없다. 후작이 세속의 권력을 대변한다면, 신부는 영적인 권위로 마을 사람들의 내면을 통제한다. 그는 제빵사에게 닥친 불행에 냉담하다. 신부에게 그 일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도덕적 훈화에 적합한 소재이다.

  마르셀 파뇰은 그런 지배 계층과 대비되는 인물로 에마블레를 내세운다. 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남자는 절대로 아내의 바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의 아내가 양치기와 떠났다고 말하는데도, 끝까지 아내는 친정에 간 것이라고 우겨댄다. 그가 절절하게 토로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은 마치 신앙과도 같다. 그에게 빵을 굽는 행위는 아내를 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의 부재는 그가 더이상 빵을 구울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에마블레의 '파업'은 마을을 마비시킨다. 파뇰이 보기에 노동 계급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이들이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의 합심으로 제빵사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신부는 오렐리가 제빵사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한다. 주저하는 오렐리에게 신부는 신약 성서를 읽어준다. 예수가 돌팔매질을 당할 위기의 간음한 여자를 구하는 부분이다. 제빵사는 아내를 맞이하며 용서한다. 여기에서 드는 한가지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애첩을 세 명이나 둔 후작의 행위는 죄악시되지 않으면서, 오렐리의 불륜은 죄사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마을 여자들은 제빵사의 아내가 젊고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한다. 그들은 오렐리가 자신들의 남편을 유혹할까봐 두려워 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매력과 욕망은 사회의 악덕이 되며, 그것은 구제의 대상이 된다.


2. 우물 파는 사내의 딸, Vichy Film이 보여주는 시대의 초상

  '언제든 타락할 수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1940년작 '우물 파는 사내의 딸'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영화의 이야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우물을 파는 직업을 가진 파스칼은 홀아비로 여섯 명의 딸을 키운다. 그의 아름답고 착한 첫째 딸 파트리샤는 공군 조종사인 자크와 사랑에 빠진다. 파트리샤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자크는 전쟁터로 떠난다. 파스칼은 자크의 부모에게 딸과 태어날 아기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파스칼은 딸을 먼 시골로 보내 출산하도록 한다. 그러던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자크의 부모는 파트리샤의 아기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도 계층에 대한 파뇰의 시각은 명확하다. 자크의 아버지 마젤은 커다란 상점을 소유한 부자이다. 떠나는 자크는 어머니에게 파트리샤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기 대신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젤 부인은 파트리샤의 행색을 보고 가난한 집 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편지를 전해주지 않고 불태워 버린다. 파스칼이 파트리샤의 아기 문제를 상의하러 왔을 때에도, 마젤 부부는 아들의 핏줄인지 알 수 없다며 모욕을 준다. 파스칼의 직업인 우물 파는 일은 매우 유용하고 가치있는 일임에도 사회에서 그의 계층적 지위는 밑바닥에 위치한다.

  계층에 대한 파뇰의 비판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시선은 차별적이다. 파트리샤의 임신은 부주의하고 부도덕한 행실로 묘사된다. 파스칼은 딸이 집안에 가져올 불명예에 대해 근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먼 곳에 보낸다. 그가 다시 딸과 손주를 데려오는 계기가 참 흥미롭다. 파트리샤는 아들을 낳았다. 딸만 여섯인 파스칼에게 아들 손주의 존재는 남다르게 느껴진다. 대를 이을 자손으로서 아이의 존재는 자크의 전사 소식에 상심한 마젤 부부에게도 희망이 된다. 파트리샤의 타락과 일탈은 비로소 사회적 인정의 범주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전사한 줄 알았던 자크가 귀환하면서 파트리샤에게 청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결말은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기묘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가 제작될 무렵,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영화는 프랑스가 패전하기 직전에 거의 완성되었다. 하지만 극중에는 당시 패전을 선언하는 필리프 페탱의 라디오 연설이 나온다. 패전 후 수립된 비시(Vichy) 정부는 독일의 괴뢰 정권이었다. 그 시절 모든 것은 독일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영화 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전 검열이 이루어진 영화들만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영화 속에 삽입된 패전 선언은 프랑스인들에게 비통함과 수치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와는 달리 점령군 독일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지위를 명확히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들이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결말은 이제는 하나가 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비시 영화(Vichy Film)'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 '제빵사의 아내'와 '우물 파는 사내의 딸'은 마르셀 파뇰의 영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그는 재치있고 간결한 대사로 코미디의 묘미를 끌어낸다. 그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시선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파뇰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전근대성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실패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들이 겪는 곤경은 멜로 드라마의 진부함과 긴밀히 결합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관객에게 파뇰의 영화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전근대적 단면을 반영하는 영화적 초상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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