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무를 볶다


검버섯에는
율무가 특효약이라더군
율무를 샀다
깨끗이 씻어서
체에 밭친다
프라이팬에다
볶는다
노릇노릇하게
20분이 지났다
손목이 가출해 버릴 것 같다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다가 데었다
왼쪽 두 번째 손가락
젠장, 검버섯을 없애서
뭐에다 쓴다고
늙는 게 부끄러워

어쨌든 마셔본다
율무차 구수한 맛
율무 한 알이 입안에서
우물우물
길을 잃었다

우리 엄마가요
어제 피부과 가서 점을 다 뺐어요
난 그게 많이 우스워요
얼굴의 점을 뺀다고
뭐가 달라져요?

오래전 크로키 수업 시간
옆자리 미대생의 말
그래 나도 우습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어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미끄덩거리는
율무 알갱이들에게
굳은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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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시인


설거지가 귀찮아
식탁에서 뭉그적
이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아니야

듣자하니
인생이 잘 풀리는 비결이
있다 하더군
딸깍

남들은 어려워 죽겠는 걸
그는 단번에 해내지
딸깍

공부도
사랑도
돈 버는 것도
모두 다
딸깍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사람이란 말이지
틈이 있기 마련이야
틈, 알아?
그 성긴 그물 사이로
불운이 불안하게
고통이 고동치며
저린 손가락에

딸깍
자판을 두들기며
써 내려가는
구멍 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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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아침 일찍 배달 음식을
시킨다

아래층에서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머리 아픈 향냄새가
화장실 환풍구로
고요히 올라온다

나,
떡국의 고기를 열심히
건져 먹었어

잔망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애는
잘못하면 낙상할 뻔했다
애비는
운이 좋았다며
킬킬거린다

떡국은 안 먹은 지 오래다
생일이 지났다
만 나이를 헤아려 본다
역류하는 기억 속에
청춘은 올라오지 않는다

화투장에 닳아져 버린
녹색 담요와
플리스 재킷은 한 형제였다
흰머리 하나가
화살표처럼
소매 끝에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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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너의 오랜 시원(始原)은
아마도 불운이었을 게다

날개를 펴면
하늘은 불온함으로 물든다

가끔은
매에게도 쓸데없이
달려드는
병신같은 패기
무법천지의 산적

아따, 저놈의 새 좀 보게
뭔 날개가 저리도 길어
시커먼 죽지는 저승사자 맨치로
목구녕에 피가 나도록 처우는구먼

아스팔트에 흐물흐물
스며드는
혐오와 찬탄

고압 송전선에
두려움 한 방울 없이
오도카니 앉아있는
까마귀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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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선 안쪽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이탈한 궤도
작고 볼품없는 협궤 열차는
자기만의 경로를 가지고 있다

저 멀리서
거대하게 울리는 기차의 출발음
하지만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나뒹굴어진 침목(枕木)
협궤 열차는 한참 동안 멈췄다

철로가 얼어붙을 무렵의
겨울 동지(冬至)
저절로 가속도가 붙어
일각고래의 뿔이 북극을 향할 때
너의 침침한 눈이
선 밖으로 내달리며
땅 밑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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