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시


시가 쉽게 쓰여지는 건
부끄러운 일인가

시에 목숨 걸다가
아프고
미쳐서
그저 목숨줄이나 연명하는데
더러는
굶어 죽기도 하지

그래도
오늘은 뭐 쓰지

엄마에게
김밥을 드렸다

성의 없는 계란 쪼가리
잘게 바수어진 당근
그리고 싸구려 햄 조각

네가 말은 거니

아뇨
새로 나온 냉동 김밥이요

개당 4천 원짜리 이 김밥은
그 맛있는 꼬다리가 없이
매우 단정하게
단 9개의 김밥만 있을 뿐이다

나는 김밥 공장에서
어디론가 가버렸을
김밥 꼬다리를 생각해 본다
엄마가 젊은 날 산처럼 말았던
그 많은 김밥도

이제 기억의 끈을 놓아버린
엄마는
당신이 하루 종일 굶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김밥 한 줄
따뜻한 물
단감 하나

게으른 식탁
게으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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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소시지


소시지가 너무 맛있다고
마약 소시지라고 쓴 사람을
누군가 고발했다
졸지에
마약 의심 사범이 된 남자는
검찰청 화장실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 했다

반드시 54가닥

왜 그러냐고 수사관에게 물어보니
말이 많다고 면박을 줬다는군
뜯어오라면 뜯어올 것이지

생으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며
남자는 마약이라는 말을 쓴
자기 손가락을 똑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아니 자신을 마약 의심 소지자로
고발한 미친 또라이를
쥐어패 주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다
마약 소시지의 뜻을
알아처먹지 못하는 돌대가리
검찰을
고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54가닥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서 얌전히 내어놓고
검찰청 정문 앞에서
두부를 사서
으깨어 먹으며
인증 사진을 찍었다

절대로 마약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그걸 본 사람들은
전율에 몸을 떨며
각성했다

그가
마약 대신에
마냥
만냥(萬兩)
망량(魍魎)을 썼다면
어떠했을까

옳거니, 그게 가장 좋겠군

만약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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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겨울 추위와
찬물에 터져나가는
손가락에 묻는다

왜 너는 그렇게 약한가

항생제 연고를 바르고
진리의 3M 흰색 의료용 반창고를
감는다

붕대가 덜 풀린
오랜 미라
겨우내 그 모양으로

새끼손가락의 동창(凍瘡)은
좀처럼 낫질 않아
봄이 오기 전까지는
울고 난 뒤에 부어터진
시뻘건 눈처럼

생각해 보니 내 평생
모험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만약 사랑의 모험을 했더라면
지금 나는 과부가 되어 있으리라

그는 오래 앓다가 세상을 떴다

처음에는 슬펐고
그리고 나서 안도했다
내가 그와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과부가 뭐 어때서
그게 두려운가
아니,
모험을 안 해본 삶의
안온함과
무기력

마알간 붉은 색의
생살을 드러낸
손가락 마디를
들여다보며
너는 왜 이다지도
약한가

자기 전에는 꾸덕꾸덕
바셀린을 바르고
흰 면장갑을 낀다

아침에는 끈적거리는
코팅된 손
그렇게 하루를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생의 냉기는 막아낼 수 없다
모험을 하지 않은 자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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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제


종로에는 영양제의 성지가 있다
비싼 영양제를 싸게 파는
약국

사람들은 바구니가 미어터지도록
약을 담는다
나는 1년 치 영양제를 산다
건강해지려고
오래 살려고

그게 아니라
여기저기 쑤셔대는
푸석거리는
무너져 내리는

막아낼 수 있다는
믿음의
방파제
철벽

루테인
비타민 B, C, D, E
비오틴
콜라겐
프로폴리스
오메가3

브라질너트에는 셀레늄이 많아요
하루에 꼭 세 알씩
맥주효모도 추가하세요
탈모 예방에 좋거든요

그런 거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죽을 때
힘이 많이 든다는군

숨이 끊어질 때 끊어져야 하는데
내가 평생 먹은 영양제들이
그 숨을 질기게 끌고 가면

그래도 아침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움큼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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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과연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영화 속 승모는 어떤 면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승모는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가 뭔지 모른다. 승모의 모습은 창작자가 늘 맞닥뜨리는 괴로움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지? 물론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에게 있어 영화를 만드는 행위도 그러하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서 영화의 소재를 찾아낸다. 영화 속 승모도 그냥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다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여자와 나눈 짧은 대화를 가지고 승모는 마침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더듬더듬, 마치 어둠 속에서 헤매듯 작가는 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것은 포커스가 나간 화면의 비가시적인 불투명성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마침내 승모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에서 연기하면서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화면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다 깊이 들어갔을 때, 승모가 마주하게 되는 물속의 알지 못하는 세계는 창작자의 내면 그 자체가 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승모는 우연히 쓰레기를 줍는 섬 주민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우연(偶然)과 영감(靈感). 그것이야말로 승모에게, 감독 홍상수에게 영화를 만드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우연과 영감의 기이한 태피스트리(tapestry)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왜 배우로 연기만 하던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한 걸까? 상국이 그 이유를 묻자, 승모는 대답한다. 영화를 찍어서 돈을 벌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은 결국 '명예'라고. 그것에 대한 열망이 승모를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승모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그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모한 열정이고 용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삼백만 원을 섬 주민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영화적 세계로 치환한다.

  승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적 작업 과정을 반추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 개인만의 특화된 방식이 아니다. 뿌연 물속에 있는듯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연과 영감에 기대어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 창작자, 예술가가 성취해 내는 예술 작업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숙명이고 명예가 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아, 홍상수!'하고 탄성이 나왔다. 홍상수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가 작가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질리지 않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국의 악기를 두드리던 중년의 남자는 2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일상성과 영화적 세계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물안에서'는 홍상수가 사생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가적 명예를 지켜내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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