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탕


기분 나쁜 찬 기운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때
쌍화탕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30초

40초는 혀가 아리고
20초는 미지근하다

아버지는
쌍화탕을 좋아하셨다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군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가난한 고학생은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 되었다

의사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약사들의 아쉬운 소리를 받아주고
30년 동안
양약을 열심히 팔아야만 했던
아버지에게 특효약은
쌍화탕이었다

1월
부서진 꿈길
흐린 눈이
타박타박

시커먼 설탕물
손끝 혈관에 이르러
미끌거리는
자판에
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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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옷이 필요한가


평생 비싼 옷은 사본 적이 없다
그래서 비싼 옷을 걸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나는 모른다

Max Mara 코트는 더럽게도 비싸다던데
언젠가 그 코트를 한번 입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은 한다

얼마 전에는 3700원짜리 청바지를
인터넷에서 사보았다
놀랍게도 배송비도 없다

Made in China
2020년도 생산
4년 전에 만든 옷이다
2,500원 배송비를 빼고
판매자는 1,200원을 손에 쥔다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저 멀리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
거기엔 Fast fashion이 남긴
거대한 옷 무덤이 있다

지구 밖 위성에서도
알록달록한 사막이
보인다고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옷이 필요한가

파홈은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

얼마만큼의 옷을 사면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을 수 있을까

3700원짜리 바지는
마음에 들지 않아
옷장에 처박아 두었다

아, 진짜 비싼 옷을 입으면 어떤가 하면요
뭐, 좋기야 좋죠

누군가
비싼 옷을 입으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비싼 옷을 사 입을 수 없으니
싸구려 옷만 사다 모으는 것인지도

Fast
Feast
Famine
Fool



*파홈: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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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권혁웅 시인의 수업이었다. 극작과에서 개설한 수업이었는데, 다른원 학생도 수강 신청이 가능해서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수강생은 한 열 명 남짓 되었나. 서사창작과와 극작과 학생에다 연극학과 학생도 있었다. 영상원 학생은 나하고 같은 과 동기, 이렇게 2명이었다. 수강생들은 수업시간마다 시를 한 편씩 써내야 했다. 그리고 각자 써온 시를 낭독한 후에, 무지막지한 합평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좀 긴장되고, 기분 잡치고, 그렇지만 재미도 있던 그런 수업이었다.

  나는 남의 시에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 독특하네요, 그 정도로 말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쪽 애들은 달랐다. 내가 생각하기엔 좀 심하다 싶은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곤 했다. 내 동기는 아마도 시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합평'을 가장한 인신공격(특히 김사과가 그랬다)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지나친 서정성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확실히 그건 내가 쓴 시의 약점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시를 써내는 것 보다, 거기에 있는 수강생들을 관찰하는 일이 나름 재미있었다.

  극작과의 유희경은 자신이 써내는 시에 대한 도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 시들은 내가 보기에 별로였지만, 권혁웅 선생의 평가는 달랐다. 선생은 유희경이 1, 2년 이내에 등단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써내라고 당부했다. 유희경에 대한 선생의 호평과는 달리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던 학생은 서사창작과의 김사과였다. 김사과의 경우는 출석부에는 '방실'이라고 쓰여 있어서, 출석을 부를 때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시를 써낼 때의 이름은 김사과였다. 아무튼 김사과가 써내는 시들은 진짜 이해 불가에다 기괴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죽음의 이미지가 많았다. 권혁웅 선생은 웬만해서는 수강생의 시에 혹평하지는 않았는데, 학기의 중간쯤 가니 김사과의 시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이런 시를 뭐라고 하냐면, 요설(妖說)이라고 해. 요설. 별 의미도 없고, 해악이나 끼칠 뿐이지."

나는 선생이 그 말을 할 때의 냉랭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사과는 자신의 시 창작 스타일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모두들 자신이 써낸 시를 낭독하는데, 극작과 학생 가운데 한 명은 읽을 수 없다고 하고는 한 학기 내내 자신의 시를 읽지 않았다. 목소리가 이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유희경과 신나게 잡담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 학생의 시도 참 특이하기는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시어가 있기는 하다. 에콰도르의 초석. 무슨 행성에 대한 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가 참 재미있어서 그날은 좋은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유희경은 권혁웅 선생의 예언대로 2년 뒤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사과의 경우는 좀 의외였다. 나는 김사과가 소설로 등단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설이라며 내팽개쳐짐을 당하던 그 언어들이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글이라고 해도, 시대나 사람들의 요구가 있으면 그렇게 작가가 된다.

  올해 들어서 나는 다시 시를 쓰고 있다. 무슨 시를 써서 등단할 것도 아니다. 그냥 다시 시를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써내면서, 이게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작업이 힘들고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는 면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의 예술 치료에는 문학 치료도 있다. 이렇게 긴 글로 써내는 것보다, 내면의 심상을 짧게 압축해서 시로 만들어내고 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삼 그 시 창작 수업을 떠올려 본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시를 즐겁게 써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시인이다. 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나는 이 늦은 나이에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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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괴로움 

 


요즘 잠을 잘 못자
회사에 미친년이 하나 있어
내가 하는 말을 죄다 녹음하거든

팀원들이 자길 따돌린다는 거야
노동부에 고발하겠대
호주머니에 녹음기 
회사 곳곳을 누비지

치매에 걸린 엄마
앞으로 돈 들어갈 일 천지야
정말 죽겠는데
그래도 회사에 다녀야지

정신이 녹아버리고
뼈가 바스라지며
이렇게
몇 년을 더 버틸까

또라이
아첨꾼
사이코패스
조울증 환자
시한폭탄들이 재깍재깍

23년을 버텼어
하지만 얼마나 더

이제 그만 나가주었으면
뒷방 늙은이 취급
역겹지

잠 좀 자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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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sphene


얼마 전부터 눈에
무지갯빛 불이 들어온다

망막에는 이상이 없어요
의사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
나는 안과 학회지 논문을
파본다

Phosphene
눈 안쪽에서 일어나는
섬광이라는군

뇌에서 삐끗
잘못된 전기 신호를
시신경에 보내
그래서 눈에
팍팍 불이 켜져

가끔은
돌아버리겠다고 생각을 한다

엉켜버린 신호들
각자의 속도로
무수히 떨어지는



*안내섬광(眼內閃光, Phosphene): 눈을 감거나 뜨고 있을 때 번쩍이는 불빛이 보이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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