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것들


세탁기 아래의 끈끈이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다 해마다
늦봄이면 야생 바퀴가
그렇게 들어온다 걔들은
진짜 엄청나게 크다
그 시커먼 덩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다
우리집까지 왔을 텐데
그대로 저승길을 밟아

5월의 비가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사흘째 내리는
저녁에 작은 방 방충망에
어리는 비닐 조각 그림자
불을 켜고 보니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난 네가 싫어,
손가락으로 방충망을
튕기며 기어코 녀석을
쫓아내었다 우리집이
아니더라도 다른집에서
잘 쉬겠지 그냥 놔둘 걸
날 밝으면 가버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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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너에게는
귀여운 아이가 있고
괜찮은 남편이 있으며
그럭저럭 돈이 벌리는
번지르르한 직업도 있어
지금은 1년째 해외여행 중
너의 인스타 맘껏
행복을 전시(展示)하지

어디서 들으니 세상은
행복 총량(總量)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누군가 8만큼 행복하면
어느 구석탱이의 누군가는
8만큼 불행해지는

너의 행복은
지상의 한 켠
추레하게 흐르는
불행 덕분이지

뭐, 적당히 불행한 것도
나쁘지 않아
귀신도 불행한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더군

귀신의 푸른 이마를
본 적이 있어
차가운 무언가가
툭 치고 지나갔지

그 후로 오랫동안
푸른 이마의 귀신을
본 적이 없어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아

타인의 불행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
그렇게 적당히 불행한
삶을 꿈 꿔

전자레인지에 너무
달구어진 유리그릇은
터질 수도 있어
누가 알아?
너의 자부심도 언젠가
팡, 하고 터져버릴지
인생은 짧아 너의 글은
더 짧아 모자라 그러니
오늘의 행복을 즐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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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의 노래


흘러간 가요를 듣는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비가 귓바퀴에
얇은 생채기를 만들고
그곳으로 시간의 통로가
생기는데 순간,
1990년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느 가수의 얼굴
그 눈부신 웃음은
시간을 눈멀게 만들어

슬그머니 사그라든 청춘
흰머리와 얼굴에
덧입혀진 검버섯
아, 수치스러워라

지글거리는 동영상 속
그들은 뛰쳐나와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건물주가 되고
사장이 되고 더러는
파산한 낙오자
돌아올 수 없는
낡은 소문으로

좋았던 한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를
마지막으로 클릭,

2024년 5월의 어느 새벽,
이 노래를 듣는 사람
있으면 손!

가만히 손을 들고는
가렵고 눅눅한 눈가
스며든 형광등 불빛
쓱, 하고 훔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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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향수(香水)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는
비가 온 뒤의 흙으로
향수(香水)를 추출한다

비가 온 뒤에 걸쭉해진
땅의 진흙을 수백 개의
항아리에 담아서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고
흙을 버리고
증류수만 남긴다

그 증류수가 비 온 뒤
흙의 향수가 된다
그 향수는 너무 비싸서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다
전 세계의 갑부들이나
쓰는 향수라고 그걸
만드는 사람이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비의 향수가 어떤 것인지
늘 마음으로만 상상했다

5월의 누런 비는
눅진거리며 하수구를
졸졸 내려간다
송홧가루는 안녕히
너의 후세(後世)는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땅에 스며든
비의 향수로
누군가의 뇌수를
타고 흐르며 쓰라린
노래를 만들어 낼 지도


**비의 향수(Mitti Attar)는 인도의 Uttar Pradesh주에서 극소량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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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회(上映會)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지
변두리 허름한 극장 5층
솔기가 살짝 닳아버린
연녹색의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관객들은
반쯤 졸았던 것 같아
진짜로 그랬어 나도
졸 것 같았거든 겨우 고작
저런 걸 찍으려고 4년을
그 고생을 해가며 아,
비탄의 하품에 눈물이
고이며 웃음이 터졌지
단편 영화들의 배경은
하나같이 여름이야
졸업작품은 여름에
찍거든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 같은 어설픈
배우 지망생들의 연기
진정성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했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너의 졸업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어
그걸 대신 쓸 수도 없고
다만 가끔, 이렇게 맑은
5월의 아침에 그저 그런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며
너와 네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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