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기 수업


엄마, 오늘은 무엇을 오려볼까요?
이 주황색의 강아지는 어떤가요? 엄마가 어렸을 적에 기르던 메리 말이에요
엄마는 메리 같은 강아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했죠
메리를 오리고 난 다음에는 나무를 오리기로 해요
나무에는 사과가 5개 열렸어요
5개의 동그라미가 보이지요? 동그라미를 반씩 접어 오리세요
그러면 엄마는 푸른 사과를 딸 수 있어요
자, 아프리카의 사자가 기다려요
사자의 갈기는 삐죽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꼬리는 그리지 않았어요 색종이는 자그맣거든요
대신에 사자의 심장을, 이렇게 하트 모양으로 그려 넣었어요

엄마는 메리와 사과나무와 사자를 곱게 오렸다
그런데 사자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솔기가 터진 낡은 소파 아래   
엄마의 잃어버린 많은 기억과 함께
먼지의 집을 짓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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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參照)


화살표를 따라가십시오
노란 플라스틱으로 된
매끄러운 화살표 말입니다
화살표를 의심하면 안됩니다
믿음, 믿음이 중요합니다
화살표는 안정적인 길을 제공합니다

건너편의 진창길이 보이지요?
저기엔 화살표가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
그걸 맞닥뜨리려거든 거기로 가십시오

당신이 화살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잠깐, 접어두십시오
당신의 뇌세포는 말라버렸으며
열정은 장맛비에 눅눅하기 짝이 없죠
화살표를 따라
가던 길이나 열심히

진창길에서 속사포를 쏘아대는
미친 인간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당신이 화살표를 따라가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화살표에 마음을 묶고
시간을 죽이며
노래하려는 입을 틀어막으십시오
순응은 축복이며
무기력은 평화입니다
화살표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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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熱帶夜)의 아침


머릿속에는 회색의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창밖에서는 에어로빅 음악이 개 짖는 소리처럼
중년 여자들의 출렁거리는 뱃살의 쓰나미
마침, 우롱차는 바닥을 드러내고는

돈을 주세요!

찻물이 끓기까지 10분 동안 아침 뉴스를 읽는다
아령을 몸에 매달고 강물에 몸을 던진
독거 남자의 비극
외로움과 가난은 늪과 같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아오리 사과를 깎다가 칼날이 스윽,
푸른 피가 나오려다 얼른 들어가 버렸다
이 세상이 싫은 것이다

매미가 운다
어차피 한철
그래도 살아야지
눈부시게 터지는 더위
열대야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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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그곳이 특별했던 이유는
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네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제 나는 네가 앉았던 그곳에
오도카니 앉아
너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눈물이 이유 없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휴대용 티슈 한 장을 뽑는다
늙음이란 싸구려 미용 티슈 같은 것
얇고 거칠고 쓰라려
조금만 세게 닦아도 생채기가 난다
그래도 쓰다 보면 익숙해져

청춘은
무료하고
무지했으며
무자비한 일상이었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바투 자른 손톱으로
아픈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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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밤


누군가 그에게 귀띔합니다
당신의 집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집으로 갑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아픈 아버지가
두꺼운 이불 아래
겨울 몽고의 마눌(manul) 고양이처럼
고요히 부풀어 있습니다

벽은 시뻘건 열기로 금이 가있고
어디에선가 끓는 소리도 들립니다
임계점(臨界點)을 느낍니다
콘크리트와
나무와
뼈와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아버지, 눈을 뜨세요, 제발요

남자는 너무나 무서워서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순간, 눈을 뜬 아버지가
거적때기같은 이불을 두르고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군요

집이 폭발합니다
밤이 소리를 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바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내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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