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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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하려다 까먹고 가만히 서있곤 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렇게 잠깐 있으면, 다시 생각이 난다.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실버타운 입주자들이 늙어감에 대해 성찰하고, 짧은 시를 써냈다. 읽다 보면 웃음이 피식, 눈물이 찔끔, 가슴이 뜨끔해진다.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산다'

  뭐가 건강에 좋다고 하면, 한번은 귀가 솔깃해진다. 몸이 안 좋아 먹는 약들에다 영양제가 더해진다. 알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이거 먹으면 정말 나아질까 싶다.

 '남은 날 있다며 줄 서는 복권 가게 앞'

  이제는 살아온 날들 보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집착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싶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자꾸만 사서 그러모으려고 한다. 다 쓰지도 입지도 못할 옷들과 신발. 그런 것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나이가 드니,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괴롭다. 노년에 접어드는 일은 아픔과 느려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노안이 오고 나니,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여서 자꾸만 안경을 벗었다 쓰곤 한다. 바느질하려고 바늘귀 찾는 일이 때론 고역이다. 늙어서 그래. 그냥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날들.

  몇 줄 되지 않는 시의 행간에는 인생의 진실이 켜켜이 숨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에 대해 노래하는 모든 이들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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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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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이야기가 가득한 책. 이 책의 내용을 내가 요약해 보면 그렇다. 종양의학과 의사는 자신이 18년 동안 보고 들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사탕처럼 늘어놓는다. 저자가 진료실에서 만난 많은 환자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통스럽게 서성이고 있다. 중간중간 희망을 주는 사례도 있지만, 대개는 힘든 투병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암 환자들의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마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단편 영화들을 이어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1시간 반 정도면 이 책을 완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흥미진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이 책이 지닌 흡인력은 상당하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책에는 익명으로 등장하는 여러 암 환자들과 가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과연 이 책의 저자는 그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도 된다는 동의를 받았을까? 물론 각각의 일화들만 보고서 독자는 그들이 누구인지 결코 특정할 수 없다. 종양의학과 의사로서, 또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저자에게 진료실의 환자들은 흥미로운 글감의 원천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자는 대단한 행운을 지닌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익명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렇게 책으로 펴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이 책에 나오는 환자, 또는 그 환자의 가족이라면 나는 상당히 놀랍고 불쾌할 것이다. 그들은 주치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출판할 수도 있고, 거기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는 사전 동의서를 작성했을까? 그랬다면 조금은 문제가 다를 수도 있다. 요즘 TV에 넘쳐나는 무수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은 제작 과정에서 초상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단 한 컷의 화면에 등장하는 일반인들에게도 출연에 대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나는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의사로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이라는 문학적 틀에서 자유롭게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차라리 저자가 자신이 진료실에서 만난 이들에 대해 소설적인 변형을 통해 글을 써냈다면 어땠을까? 소설이라고 해도 저자의 직업이 '의사'라는 점에서 환자의 개인 정보에 대한 보호 의무가 전적으로 면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저자의 글, 그것이 수필이든 소설이든, 그것을 읽는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글에서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정확히 떠올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문득 나는 재일 교포 소설가 유미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미리는 자신이 쓴 소설로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다. 유미리는 자신이 알고 지낸 지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다. 그것을 알게 된 지인은 유미리의 소설을 읽는 이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유미리는 강변했다. 작가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소설적인 가공을 통해 써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재판부는 유미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인물의 외모가 실제 유미리 지인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유미리는 그 재판에서 패소했다.

  나는 나를 치료하는 주치의가 언젠가 자신이 쓰게 될 글에서 나의 질병과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감으로 써먹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라면 그런 의사에게는 절대로 진료받고 싶지 않다. 이 책은 겉으로는 휴머니즘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개인적인 편견과 냉소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가깝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상당히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내가 진정성을 느꼈던 부분은 저자가 써 내려간 자신의 개인사에 있었다. 저자는 고등학생 때, 폐암으로 부친을 잃고 어렵게 의대에 입학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는 대목에서는 저자에게 '종양의학'이 숙명이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단편적인 글에서 느끼는 아주 작은 진정성 말고는,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대단한 미덕을 찾지 못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암 환자들의 이야기가 상점 진열대의 상품처럼 놓여있을 뿐이다. 

  과연 이 책을 읽는 다른 이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기는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의사의 고뇌가 아니라, 저자가 의사로서 지닌 권위와 특권 의식이 미묘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나에게 이런 책 읽기의 경험은 결코 감동적이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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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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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부터 TV 리모컨의 전원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아주 힘을 꾹꾹 주어서 눌러야만 작동이 되곤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새 리모컨을 사려고 했다. 그래도 전원부 버튼만 안되는 것인데 고칠 방법이 없나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고칠 방법을 알려주는 글들이 주르륵 뜬다. 고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버튼의 접점이 닳거나, 이물질로 인해서 생긴 문제이므로 리모컨 분해 후에 접점 부위를 손보면 된다. 이물질을 제거해도 잘 안되는 경우는 전도성이 있는 알미늄 포일을 접점에 작게 붙여주면 된다. 그렇게 리모컨은 다시 살아났다.

  아주 사소한 수리였지만, 그걸 해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접점(接點)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기판이 정상이라고 해도 전류가 흐르지 않아서 작동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문제들이 일의 시작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글쓰기'의 경우에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제대로 된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감,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 말고 내일은 쓸 거라는 다짐,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영감, 그런 것들... 도러시아 브랜디는 '작가 수업'에서, 글을 쓰려는 이들이 마주하는 그런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사실 이 책을 오래전에 사두고 그냥 책장에 넣어두었던 것 같다. 작년 가을부터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예전에 샀던 글쓰기 책들을 가끔씩 들여다 보고 있다. 대개는 그냥 흘려버리는 그저그런 조언들이지만, 이 책은 좀 다른 면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작가'라는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디는 작가는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매일, 일정량의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습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직업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는 충고를 곁들인다.

  우선 글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시간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도 익숙하게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마다 자신이 더 선호하는 작업 시간대가 있기는 하다. 브랜디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일러준다. 어느 시간대든 글을 쓸 수 있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비로소 작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를 얻게 된다. 꾸준함과 성실함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브랜디는 그 다음의 작업으로 스스로의 글에 비평하는 자아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비판적 자아는 일단 내려두고, 무의식 속에 자리한 창조적인 글감들을 길러 올리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줄리아 카메론이 쓴 '아티스트 웨이'였다. 글쓰기에 대해 다룬 그 책에서도 창작에서의 무의식의 중요성을 다룬다. 솔직히 그 책은 내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카메론의 그 책은 브랜디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많은 글쓰기 책들의 하나였다. 1934년에 이 책이 출간된 이후로, 글을 쓰려는 많은 이들이 브랜디의 조언을 따랐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구식의 관점과 조언이 있기는 해도, 작가 지망생에게는 커다란 줄기에서는 귀담아 들어야할 이야기들이 있다.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 막 글쓰기에 들어선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생각대로 글이 써지지 않거나, 쓰다가 그만 두기를 반복하는 이들은 자신의 글쓰기 버튼의 접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만의 글쓰기 습관과 일과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에 글쓰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 보라.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은 마치 허름한 원조 맛집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친절한 고객 응대는 없다. 다만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진 음식이 차려질 뿐이다. 결국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작가됨', '글쓰기'의 본질이다. 매일, 일정 분량의 글을 써내는 습관과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이야기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작가 수업'은 그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첫걸음, 그리고 그 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원칙을 다룬다. 글을 쓰려는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구판이 절판되고, 2018년에 다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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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천둥의 시대 -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
햄프턴 시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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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 꽤 많다. 도로에서부터 산, 국립공원, 육군 기지에도 붙어있으며 네바다 주는 주도(州都)를 그의 도시(Carson City)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평생동안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미국 전역에 퍼졌고, 생전에 그의 모험담을 묘사한 싸구려 소설책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책 속의 그 남자를 용맹함과 지혜로움, 개척과 도전 정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유명한 정치인도, 정식으로 군에 복무한 군인도 아니었다. 비버 가죽과 모피를 팔던 상인에서 탐험가의 길잡이가 되었고, 자신이 습득한 미개척지의 해박한 정보를 바탕으로 군대의 참모로 맹활약했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그 역사의 거의 전부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미국이 뉴멕시코를 습득한 미국-멕시코 전쟁, 나바호 인디언들과의 전투, 남북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었다. 그의 이름을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의 지명에서 꽤 자주 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키트 카슨(Kit Carson), 햄튼 사이즈가 쓴 '피와 천둥의 시대'는 그의 이야기와 함께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조망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카슨은 계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6살에 집을 떠난 그는 말안장 가게의 견습생 일을 하다가 그만 두고 모피 사냥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에 비버를 잡아서 그 가죽을 파는 일은 꽤나 큰 돈벌이가 되었다. 사냥꾼과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카슨은 험한 오지와 산의 지리에 익숙해진다. 모피 무역이 시들해질 무렵, 그는 미국의 정치인이며 탐험가인 존 프리몬트(John Charles Fremont)의 측량 탐사 여행에 동행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본격적으로 발휘한다. 프리몬트 트레일(Fremont Trail)은 카슨의 도움으로 만든 탐험로였다. 카슨은 서부의 산과 지형에 정통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무엇보다 그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인디언들과의 전투였다. 그가 인디언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를 쟁취했는지, 패배자에게 어떤 치욕을 안겨주었는지에 대한 무용담이 대중에 퍼져나갔고, 그는 오늘날로 치면 유명인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정식 군인도 아니었으면서 장군의 참모로 중요한 조언을 했고,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뤘다. 그 대부분은 나바호 인디언들과의 전투였다. 그와 미국 군대에게는 전투였지만,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절멸에 이르는 비극의 여정이었다.

  '피와 천둥의 시대'는 카슨의 일생에 등장하는 미국 역사의 여러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온다. 미국-멕시코 전쟁을 지휘했던 스티븐 커니 장군, 남북 전쟁을 치룬 북군의 셔먼 장군, 나바호 인디언들과의 전투로 그들을 몰살의 위기로 몰아넣은 칼턴 준장에 이르기까지 카슨은 그들의 주요한 여정에 함께 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카슨이 남부 출신(노스 캐롤라이나)으로 자신의 처가(세 번째 부인은 뉴멕시코의 히스패닉 출신이었다)를 비롯해 남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북군으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카슨이 노예 해방을 내건 공화당의 정치 신념에 동참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노예 소유주였고, 그에게는 그런 정치적 대의 보다는 현실적 판단이 우선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북군은 승리했고, 카슨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언제나 승리자의 편에 서있었다.

  모피 사냥꾼으로 시작한 그의 직업적 이력에서부터 인디언들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카슨에게 인디언들은 적이기도 했지만, 때론 동지이기도 했다. 사업의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인디언 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인디언들의 문화의 관습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은 인디언 여성이었다. 그는 비록 자서전에서 의도적으로 그 부인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적어도 인디언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으로 가득찬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인디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인디언 부족, 특히 나바호족의 비극적 미래와 이어졌다. 서부 개척 시대에 미국 군대가 인디언들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것은 단지 군사력뿐만이 아니었다. 거친 오지의 전투에 있어 카슨과 같은 협력자의 도움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뉴멕시코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나바호 인디언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땅이 멕시코의 것이었을 때에도 나바호족은 그곳 거주민인 히스패닉들을 비롯해 이웃 부족 아파치족과 잦은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땅과 가축을 두고 벌이는 생존의 싸움이었고, 그것은 그곳이 미국 땅이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패배로 점철된 학살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인디언들에 대한 병적인 증오를 가진 칼턴 준장은 나바호족들에게는 지옥의 사신이었다. 물론 카슨도 그 살육극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카슨은 나바호족의 '몰살' 보다는 '격리'라는 방식이 미국의 미래를 위해서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보호 구역(Indian Reservation)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실행되었다. 카슨은 자유롭게 흩어져 살던 나바호족을 황무지와 같은 땅에 몰아넣는 그 여정, 'Long Walk'과 정착지 Bosque Redondo에서의 비참한 삶으로 나바호족이 절멸의 위기에 처한 모든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64년에서 1868년에 이르는 그 기간 동안에 나바호족의 인구는 9000명에서 40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미국 정부는 이주 정책의 실패를 자인했고, 나바호족에게 이전의 거주지로 돌아갈 자유를 부여하고 새로운 관리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피와 천둥(Blood and Thunder)'은 영어 관용구로 '유혈과 폭력이 자행되는'이라는 뜻이다. 키트 카슨의 생애는 그 말과 정확히 부합했다. 저자 햄튼 사이즈는 '피와 천둥의 시대'에서 카슨을 매우 온정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술한다. 그는 카슨을 모험가와 탐험가, 모범적인 군인, 인디언들에게 연민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낸다. '인디언 보호구역'은 나바호족에게 절멸 대신 생존을 보장해준 카슨의 인디언에 대한 성찰과 연민을 보여준다는 식이다.


  키트 카슨의 평판은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의 '영웅'에서, 1970년대에 인디언 역사와 관련된 여러 저작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무지막지한 학살자'로 급전직하했다. 그러나 그 반응이 격렬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런 흐름 속에서 카슨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매우 미국중심주의적인 사관으로 기술된 책이다. 어떤 면에서 미국인들에게 키트 카슨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것은 미국의 근대 역사에 대한 부정이고,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향된 온정주의를 '객관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제 3자의 시선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역겹게 느껴진다. 미국 서부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들에게 몰살 보다는 길고 고통스러운 미래를 선사한 인물, 키트 카슨에게 주어진 학살자의 오명은 결코 탈색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한계는 카슨과 함께 했던 미국 군대,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 지시한 당대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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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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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EBS 클래스e에서 조영남 선생이 강의한 '중국 엘리트 정치'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집단 지도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을 보면서 중국의 집단 지도 체제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은 소련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공산주의 혁명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의 근대 100년사를 다룬다. 제목만 들으면 꽤 어렵고 읽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인문서적 같다. 그 선입견을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가볍게 깨버린다. 그는 복잡하고 딱딱한 혁명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서 들려준다. 총 20개의 챕터로 나누어진 작은 주제의 이야기들은 독자를 러시아 혁명의 역사 한 가운데로 초대한다.

  저자는 자세하고 방대한 역사적 사실에 주요 인물들의 개인사를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역사적 인물들의 서간과 전기, 자서전에서 발췌한 자료들은 이 책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자칫 건조하고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재미를 더한다.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제정 러시아 말기의 상황을 설명할 때, 니콜라이 2세와 황후, 라스푸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레닌과 스탈린 체제를 설명할 때는 그 두 사람의 인간적 특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정치 상황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기술한다. 이런 미시사적 관점이 개입된 역사 서술은 이제는 역사 관련 서적에서 부인할 수 없는 대세인듯 싶다.

  책의 초반부에는 니콜라이 2세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정치적 관점이 어떻게 혁명의 불쏘시개로 작동했는지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좀 더 유연하고, 민중을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는 급진적 혁명에 이르는 대신에 입헌 군주국의 형태, 또는 좀 더 유화적인 정치 체제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축적된 여러 문제들이 터지는 비등점의 시기를 포착했고, 그 기회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러시아 민중들과 이루어낸 혁명의 과정에는 단지 러시아 내부의 요인만 작동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외적 요인이 혁명의 위기 상황을 넘기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레닌의 사후에 권력을 용의주도하게 차지한 스탈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스탈린은 국내 정치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전쟁'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돌려서 소련 국민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저자는 스탈린 사후에 권력을 차지한 흐루시초프의 명암도 세밀하게 조명한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스탈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소련 국민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변덕스럽고 전문성이 결여된 정치 능력은 집단 지도 체제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1964년, 브레즈네프가 흐루시초프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는다. 그는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열망과는 동떨어진 수구적 인물이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시장 경제의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도, 그 시기를 놓침으로써 소련은 기나친 경제 침체에 들어간다. 나에게 다소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왔던 부분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소련의 주류(보드카)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부분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그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정치는 소련 사람들의 일상에 술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치는 러시아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저자는 그 한계도 명확히 지적한다. 고르바초프는 그 모든 변화와 개혁의 정책을 '소련'이라는 국가 체제 안에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기존의 소비에트 연방 체제는 이미 수명이 다했는데도, 고르바초프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미봉책으로 급격한 체제 붕괴를 가져왔다. 그 시기는 또한 공산당원과 지배 계층들이 국가 자산을 심각하게 유용함으로써 경제적인 혼란과 부정부패가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탐욕스럽고 무능력한 옐친은 운좋게 그 혼란기를 틈타 러시아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러시아를 보여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러시아 혁명의 100년사를 다룬다. 푸틴은 피와 절망, 실패들로 얼룩진 혁명사의 맨 나중에 등장한 인물로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어떻게 푸틴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지 그 기원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민족주의와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절묘하게 결합한 자신만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고, 그것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왜 대다수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을 반대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늘 궁금했다. 이 책은 그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러시아 혁명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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