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위한 문


5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상한 문이 벽에 딱
붙어있었다

그걸 만든 사람은
작가를 위한 문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5개의 손잡이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후
작가를 위한 문에는
단 한 개의 손잡이만
남았을 뿐이었다

건물이 철거되면서
작가를 위한 문은
인정사정없이
뜯겨졌다
부서진 건물 사이를 헤치고
작가는 그 손잡이를 찾아서
들고 나왔다

저 멀리 흐르는 강물에
손잡이를 내어던지니
널따란 그물이 되어
온갖 것들이 걸려들어 온다

한쪽 눈을 잃은 물고기와
낚싯줄에 발이 잘린 거북이
배가 부어오른 복어는
연신 푸른 피를 토해낸다

아무도 너희들을 원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내쉬어 보는
숨의 온기는
손잡이에
작가는 그것을 잊지 않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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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 고구마


미쳐버린 물가에
처음으로
한입 고구마를 주문했다
박스를 열어 보니
붉은 동전이
입을 벌리고
나를 반겨준다

먹는 거 버리면
벌 받는다
어떻게든 먹어봐야지
필러로 껍질을 벗기다가
손바닥 껍질이 날아간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한입
고구마가 부엌을 횡단한다

화가 치밀어서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건다
고객님, 그건
한입 고구마입니다
20g에서 50g의 고구마를
가리키죠

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을
나는 이렇게 깨닫는다
먹는 것에 돈을 아끼려 들면
누구나 돼지 축사의
여물통 신세가 된다

장사꾼은
한입 고구마라는
쓰레기 감성을 입혀
물건을 판다
지 자식 새끼 입에는
들어가지도 않을

어떻게든
한입 고구마를
먹지 않기 위해
경주하는
한입의 인생

그래도 누군가는
먹어야 할
한입의 사료
한입의 모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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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무를 볶다


검버섯에는
율무가 특효약이라더군
율무를 샀다
깨끗이 씻어서
체에 밭친다
프라이팬에다
볶는다
노릇노릇하게
20분이 지났다
손목이 가출해 버릴 것 같다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다가 데었다
왼쪽 두 번째 손가락
젠장, 검버섯을 없애서
뭐에다 쓴다고
늙는 게 부끄러워

어쨌든 마셔본다
율무차 구수한 맛
율무 한 알이 입안에서
우물우물
길을 잃었다

우리 엄마가요
어제 피부과 가서 점을 다 뺐어요
난 그게 많이 우스워요
얼굴의 점을 뺀다고
뭐가 달라져요?

오래전 크로키 수업 시간
옆자리 미대생의 말
그래 나도 우습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어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미끄덩거리는
율무 알갱이들에게
굳은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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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시인


설거지가 귀찮아
식탁에서 뭉그적
이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아니야

듣자하니
인생이 잘 풀리는 비결이
있다 하더군
딸깍

남들은 어려워 죽겠는 걸
그는 단번에 해내지
딸깍

공부도
사랑도
돈 버는 것도
모두 다
딸깍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사람이란 말이지
틈이 있기 마련이야
틈, 알아?
그 성긴 그물 사이로
불운이 불안하게
고통이 고동치며
저린 손가락에

딸깍
자판을 두들기며
써 내려가는
구멍 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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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아침 일찍 배달 음식을
시킨다

아래층에서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머리 아픈 향냄새가
화장실 환풍구로
고요히 올라온다

나,
떡국의 고기를 열심히
건져 먹었어

잔망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애는
잘못하면 낙상할 뻔했다
애비는
운이 좋았다며
킬킬거린다

떡국은 안 먹은 지 오래다
생일이 지났다
만 나이를 헤아려 본다
역류하는 기억 속에
청춘은 올라오지 않는다

화투장에 닳아져 버린
녹색 담요와
플리스 재킷은 한 형제였다
흰머리 하나가
화살표처럼
소매 끝에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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