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야


매일 머리를 감는데도
머리가 가려워
어디서 들으니
그건 머리가 빠지려고
그런 거래

온몸이 중력을 느껴
피부도 잇몸도 땅을
향해 천천히 늘어지지
늘어진 게 편한 건
옷뿐이야

주말 저녁에는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놔
거길 가보고 싶지 않아
그걸로 충분해
아픈 몸은 진통제에
절여졌지

구멍 난 흰색 양말을
초록색 실로 꿰매었어
흰색 실은 오래전부터
없었거든 반짇고리엔
검은색 실과
초록색 실만

초록색으로 꿰맨 양말을
신고 천천히 걸어봐
놀이터에서 소리를
지르는 계집애들
저린 왼쪽 팔로
불안이 타올라
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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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까치


길을 걷다가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신과
부딪혔습니다
당신, 괜찮은가요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군요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났습니다
어쩜 저렇게
멀쩡히 걸어갈 수
있을까요
신기하네요
당신도 좀 아팠으면
좋겠는데

얼굴만 보면
소년인데
당신의 흰 머리카락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머리카락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화단에
봄까치 한 쌍
둥지 지을 나뭇가지
입에 물고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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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의 시


요점은 그거야
트렌드를 읽으라고
홍대 클럽에서
한복 입고 춤출 거냐고
그건 아니잖아
지금의 시대가 원하는
시가 있어 그걸 붙잡아
언제까지 방구석에서
시어 붙잡고 비늘
떼어 다듬을래

최소한 등단을 하려면
말이지 심사위원 눈에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내 시를 써야겠다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된다고 당선이 되어야
글로 밥벌이를 하지

트렌드 따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같은 머저리들이
널려있으니까
서점의 서가에
바보들의 시집이
넘쳐나는 거야

경계를 탐험하며
절망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써야지

백날 그래봐라
골목길 외등 아래
추레한 차림으로
서있는 거지의 외침을
누가 들어주니

트렌드를 따라
중심으로 들어가라고
그게 능력이고
진짜 시야

싸구려 커피에
배를 곯는
무직, 시인은
분을 씹으며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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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놀이터의 애들은
정신이 가출해
악을 쓴다 먹다 버린
컵라면 그릇은
바람의 길을 따라
유랑한다

집 앞 작은 벚나무
쥐눈이콩만 한 꽃망울
잔뜩 올려놓고
하나, 두울, 셋
언제 꽃을 피울까
휘어지는 바람
속앓이는 깊다

가려워 부어터진
눈을 씻으며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비 오는 날의 광인
서성이는 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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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플레이리스트


흘러간 가요를 틀어놓는다
고운 얼굴의 남자 가수는
예정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
그 가수는 이제
목사가 되었다

빌리 조엘의 노래에 이어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가
나온다 마돈나의 얼굴이
다음 동영상에 뜬다
세상에 마돈나의 얼굴이
저리도 빛나다니 저 시절의
마돈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뭐니 뭐니 해도 한밤에는
릭 애스틀리가 제격이다
풋풋함과 흥겨움이 섞인
그의 노래들에는
1980년대와 젊음이
박제되어 있다
중년의 애스틀리는
그 노래의 발뒤꿈치에
다가서질 못한다
슬프게도

밤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가로등 켜는 일을
깜박한 관리소 직원은
숙면 중이다 불빛이
없는 놀이터는 괴물의
입처럼 어둠을 삼킨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저만치 가는
사랑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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