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웰의 죽음


그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많은 이들을 끌어모았다
그 궁전에는 커다란 괴물이
있었다 시뻘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괴물은 궁전을
찾아온 무수한 사람들을
삼켰다 더러는 괴물이
트림을 할 때 삼켰던
사람들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 궁전 근처를
배회하였다 가진 것을 다
내어팔면서 거지가 되어서도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 궁전의 외벽에는
'영화'라는 글귀가 아기머리만한
다이아몬드로 단단하게
박혀있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이 큰물이 되어 궁전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사람들은
떠밀려가면서도 그 말들을
주워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살아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오리 솜털같은 날들이 흘렀다
아, 그가 지은 궁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혹되어
인생을 망쳤던가 이제 그 궁전을
지은 이는 눈을 감았다 보드웰이여
편히 쉬시오 나는 아직도 그대의
궁전에서 주워온 글자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오


*David J. Bordwell(1947-2024): 미국의 영화학자. 영화사와 영화 이론의 뼈대를 구축한 선구적 학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토요일 저녁 8시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토요일 저녁에 늘
배달 음식을 시킨다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라고 쓰면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함은 언제나
경멸의 대상이 된다
남의 습작 시에다
재능 없음,
이라고 써놓은 손가락은
진부하게 싸가지가 없다
네가 뭔데, 그런데
재능이 대체 뭔데,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유령이 복도를
배회하는
토요일 저녁 8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봄밤


바람이 오지게도
부는 봄밤
부엌 창문을 닫으며
기억에 스며든
한기를 느낀다

먼저 눈을 감은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어그러진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쓰린 속에 생강차를
들이킨다 더 속이
쓰리게

안방의 벽을 타고
옆 라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죽을 듯
토하는 중이다
그의 병증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나는 그의 쾌유를
빌지 않는다 아마
그도 나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하릴없이 앉아서
시를 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렇게 쓰려다가
그만둔다 이미
임자가 있다

봄을 잃고
나는 쓰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개


안개를 부르던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정훈희와 같은 합창반이었거든
그래서 걔를 잘 알아
엄마, 엄마가 정훈희를
어찌 알아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

네가 나를 미친 에미로
만드는구나
못된 년

못된 딸은
정훈희가 미워졌다
안개가 싫어졌다
서둘러 유튜브 창을
닫았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안개가 가득한 것이
분명해 딸은 엄마의
머릿속에서
길을 잃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를 읽는 법


방안에 들어온 코끼리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코끼리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그 살점들을 진열해 놓고
이것은 어느 부위인가를
토론했다 누구는 다리라고 했고
누구는 코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구는
코끼리의 꼬리라고 토론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동이 터오자 누군가
살점 하나를 자신의 얼굴에 문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거야 마침내 그걸 보던
구경꾼이 소리질렀다

이봐 정말 그렇다면
넌 놀이공원에나 가봐
거기 놀이기구에서
몸의 떨림을 느끼는 거지

내가 하나 알려주지
시를 읽는다는 건
네 머릿속 뇌수에
멋대로 돌아다니게
풀어두는 거야
네 몸뚱아리로 느끼는 게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