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서있는 사람들에서...)

언젠가 행각하던 길에 날씨가 궂어 남도의 한 포교당에서 며칠을 묵고 있을 때였다. 그 절 주지 스님은 노령인데도 새벽 예불이 끝나면 자기 방에 돌아가 원각경을 독송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그 때 들은 몇 구절은 아직도 기억의 귓전에 쟁쟁하게 묻어있다.

"심청정고(心淸淨故)로 견마(見魔)가 청정하고
견청정고(見淸淨故)로 안근(眼根)이 청정하고
안근청정고(眼根)로 안식(眼識)이 청정하고..."
(마음이 맑으므로 마를 보아도 맑고,
보이는 것이 맑으므로 눈이 맑으며,
눈이 맑으므로 눈의 작용이 맑다는 뜻이다.)

노장님은 몇십 년째 '원각경'을 독송한다고 했다. 낭랑한 독경 소리를 객실에 앉아 들을 때 아무렇게나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는 독송의 일과에 이변이 생겼다. 갑자기 독경 소리가 멈추더니 "이놈! 이 버릇없는, 이 고얀 놈 같으니..."하는 노장님의 노기에 섞이어 "이놈의 노장, 눈을 떠!"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객실에까지 크게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급히 주지실로 가 보았더니, 그 전날 새로 온 젊은 객승이 주지 노장과 마주 앉아 서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노장님은 화가 잔뜩 나 어쩔 바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경전을 낯선 나그네는 한 손에 말아 쥔 채 웃음기마저 띠면서 노장의 이마를 톡톡 치고 있었던 것이다.

노장님은 오랜 세월 그저 경을 읽고 있을 따름이지 그 경전의 내용대로 살 줄은 몰랐다. 마음의 맑음을 줄줄 외우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맑음을 맑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젊은 선승은 지묵의 경전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노장을 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노장의 마음 속에 있는 노장 자신의 경전을 읽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장은 지묵의 경전에만 팔려 경전으로 머리를 치던 그 뜻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화만 내었다. 책에 가려 자신의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