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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함께 읽기
강준만 외 지음 / 돌베개 / 2006년 8월
평점 :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기날은 빛나고
황인욱(콘텐츠 코디네이터, 감옥 동료)
남다른 악수
그의 왼손이 나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손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두운 터널을 닮았던 전주교도소 4사하(舍下) 독방 안으로 건네진 그 손.
나는 말보다 다정했던 그 손을 기억한다.
통일! 혁명!
나의 젊음을 사로잡았던 두 개의 슬로건.
바로 그 모두를 가지고 있었던 조직의 빛나는 스토리를 기대했던 내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무유용”當無有用
그릇은 스스로를 비워야 비로소 쓸모를 만든다.
그는 나를 위해 빈 그릇을 내보였다.
빛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그건 내가 채워야 할 것이었다.
내가 연못가의 나르시스처럼 조그만 거울에 얼굴을 처박고 있을 때,
그는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어렵고 거창한 언어들을 가지고 내가 아직 관념의 놀이를 계속하고 있을 때,
그는 미싱을 타고 있었다.
그는 특별한 것도 없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잡은 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까지는 십 년이 더 흘러야 했다.
나는 대구교도소 양재공장에서 미싱을 타고 있었다.
바늘이 손가락을 아프게 찔렀고, 나는 십 년 전의 그 특별한 악수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아마도 지혜를 구하는 눈이 아니라, 호기심에 애타는 눈을 보지 않았을까?’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어린 나이에 정말 대견한 생각을 했네.
그렇다면 우선 삶의 터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게.
지금 자네 삶의 터전은 바로 이 담장 안일세.
어서 이 감옥에 뿌리를 내리게.
가장 올바른 의미는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내 맘대로 채웠다.
그것은 내가 반드시 겪어야만 할 좌절을 안타까워하는 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방관의 손이 아니라 연대의 손이었다. 살림의 손이었다.
그는 내 삶의 어두운 터널에서 그렇게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던 사람이다.
그의 어떤 주옥같은 글보다, 그의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보다
나에겐 그의 따뜻한 손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그의 오른손은 나의 왼손을 잡았다.
그것은 내 삶의 갈피갈피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언제나 절절하게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아주 특별한 의식이었다.
수인은 공을 가두지 않는다
2192번과 2004번이 축구를 했다.
메마른 땅 위에서 골대도 없이.
우리의 번호는
등이 아니라 가슴에 새긴 수인번호다.
그가 감옥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것이다.
스물한 해를 기다려서 우리는
전주교도소의 하얀 담벼락 아래에서 만나
그렇게 공을 찼다.
골대는 없다.
하수구 뚜껑 위로 공이 지나가면 골이다.
제법 낭만적인 우리들의 공차기 규칙은
그냥 사방이 열린 시멘트 뚜껑 위로 공을 통과시키면
그대로 골이 되는 것이다.
수인囚人은 공을 가두지 않는다.
사방이 열린 사각의 공간 위로 우리는 연방 동그란 공을 통과시켰다.
그는 나보다 훨씬 축구를 잘한다.
걸음마를 늦게 배운 내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나는 스스로 위로했다.
뛰어넘어야 할 상대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가끔씩 우리는 공을 담 밖으로 차냈다.
우리의 공은 그렇게 담을 넘나들었다.
그때 몇 대 몇으로 내가 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담 밖으로 공이 넘어갈 때의 탄성과
교도소의 높다란 회벽에 부서지던 하얀 햇살만큼
그때 우리는 모두 눈부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