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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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예민해?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

일바만 겪는 일 갖고 오버하지 마.

피해의식 있는 거 아냐?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해야해?

왜 유난이야?

내가 보기엔 아닌데?(31)

 

언어는 생각이 결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론보다

언어의 측면을 곰곰 따져본 이 책은 의미가 크다.

 

위의 질문들은 페미니스트들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남자든 여자든)이

흔히 내뱉기 쉬운 말들이다.

큰 고민없이 살면,

내가 예민한 건가?

나만 유난인 건가? 하는 자책에 빠지기 쉽다.

 

이번 한샘의 사건을 보나,

이 책의 발단이 되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나,

여성이 추행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이 어제 오늘은 아니지만,

그것을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거나,

혐오는 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흑인이 아닌데 흑인이 겪은 차별을 알고 싶다면

백인에게 들어야 합니까?

또 그 경중은 누가 정해야 합니까?(47)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교육이나 학습이 없이

인터넷 댓글 정도로 판단하게 된다면,

페미니즘이 유별난 일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은 크다.

 

페미니즘 강연을 듣는 사람은

이미 공감하고 들을 필요가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개연성이 높다.

 

가부장제 때문에 남성도 힘들다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가부장제를 없애자는 건지,

다 힘드니 다같이 참자는 건지 확인(57)

 

군대 갔다왔다면서 논점을 흐리는 대화들 역시 그렇다.

여성들은 비싼 선물만 요구한다면서 김치녀라 욕하는 태도 역시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겉보기엔 그럴싸해보이지만

철저히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구조가 교묘하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땐 안 그래.(65)

 

이런 대사 속에 남아 있는 가부장제의 흔적.

한국은 차별 최상위권에 드는 나라였으니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서양에서도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리베카 솔닛의 책이 있듯,

세상은 차별을 없애는 데 지극히 소극적인 구조다.

 

사랑해야 할 사이인 상대방의 비명을 들으면서 그냥 살거나,

진짜로 남녀가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거나.(70)

 

여지껏 상대방의 비명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까지 만들면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단속을 했다면,

이제 시끄러운 시기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 시대임을 밝혀야 한다.

 

그냥 네가 참아.

그냥 좋게 넘어가.

너만 손해야.(89)

 

이런 언어로 피해자를 조용히 시키는 것을 <2차 가해>라고 한다.

'남자답지 못하게'라든가,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같은 것은 모두 2차 가해의 예비음모쯤이었다.

언어는 중요하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지동설이 당연시된 것이 수백 년이지만, 아직도 해는 떠오르고(일출, sun-rise)  있으니 말이다.

 

직장내 성폭력은 이 일이 알려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생긴다고 합니다.(91)

 

즉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두려워한다면 막을 방법이 있다는 것.

 

각자 원치 않는 상황에 단호하게 행동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야할 때 정작 나오지 않는다.(93)

 

그렇지만, 작가도 경험했듯,

무대포인 남자가 반말로 슬근슬근 농지꺼리를 걸어올 때

열몇 명의 여성으로서도 쉽게 대응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직장 상사나 학교 교사일 때에야...

 

"당신은 너무 고고한 척한다. 대체 얼마나 더 노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혈서를 쓰고 따라다니고, 멋대로 선물을 안기고,

결국 죽이겠다고 기다리다 실패하고, 협박하고,

이후 자신의 소설에 박녹주와 연애를 했다는 내용을 멋대로 써놓은 김유정이

거절당한 뒤 내뱉은 말.(112)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백년 전과 사람의 뇌 구조는 많이 다르지 않은 듯 싶다.

 

채 한남충이란 말이 등장하자마다 '남혐'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되고

곧바로 사회 문제로 부각된 현 상황은,

'김치녀'를 위시한 온갖 여성 혐오 발언이

오랫동안 문제없이 존재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노릇.(141)

 

메갈이나 남혐에 대하여 심각한 사람도 있다.

이번에 김주혁이 죽었을 때도 '한남충 하나 죽었다'고 쓰는 무정함은 혼나도 싸다.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각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중 하나가 언어적 측면인 것은 당연한데,

이 책의 가치는 거기 있다.

이 책은 무슨 정희진 류의 이론서도 아니고,

유명한 서양 인사의 연설문도 아니지만,

한국어에서 쓰이는 언어의 문제는 재고가 필요하다.

 

네 앞에서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불평이 들린다면 좋은 신호입니다.

원래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183)

 

한국이 정말 여성이 살기 안전한 나라이고,

구직이나 급여에서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시끄러워져야 하고,

이런 책에 반발심이 드는 이들에게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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