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 시전집
박정만 지음 / 해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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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상 살다 보니 병도 홑적삼 같다...<죽음을 위하여>

... 숨쉬는 한밤의 일만은 끝내고 싶다... 나는 그저 바람부는 하늘로 돌아가야지... 너무 많이 외롭고 슬펐다... 마음은 항상 절집 추녀에 누워 명부전 부처님께 가는 곳을 물었었지만 지장은 땅속의 사람에 누워 산 자의 죽음 하나 건지지 못하고 그저 그런 날만 죽기까지 서원하고서... 이젠 평온한 모습으로 잠을 자야지...<고요한 잠으로>

저쪽 서빙고동 전철역쯤의 어느 모진 동네의 어두운 지하에 갇혀 조여오는 구두코에 맥없이 마음 상했네... 3일간의 추억이었어...<먹빛으로 물들어>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종시>

네 쌓은 탑이 하늘에 닿아, 이 뜻을 만방에 전하라. 눈물 있으면 그 슬픔 하늘에 주고 슬픔 있으면 그 슬픔 땅에 주어라. <불국사 역전>

박정만 시인을 읽노라면, 서정주가 그 안에 살아있다. 사람은 좀 모자라 친일을 해 놓고도 전두환 만세불렀으면서도 부끄런줄 몰랐지만, 모국어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감칠맛나게도 살렸던 그 미당의 노랫가락이 박정만 안에 살아있다.

짧은 서정적 노래에선 3음보의 가락으로 까치발 뜨다가도,
좀 뻣뻣하기도 한 생각이 피어오를 땐 4음보를 쳐올린다.

박정만 시집을 읽노라면, 그가 죽기 1년 전, 거의 10분 간격으로 써내린 싯구들은 그야말로 신내림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시도한 넉줄 더하기 한 줄의 시 형식.

넉줄은 기승전결의 한시 형식으로 앞에는 경치가, 뒤에는 정서가 나오는 선경후정이고,
마지막 딱 한 줄 떼어 쓴 것은 마치 일본의 하이쿠라도 되는 양, 심금을 퉁~~ 울리고 만다.

그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긴 자유시를 쓰기엔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고정된 시조같은 시를 쓰기엔 피가 뜨거웠던게지. 하이쿠가 보여주는 인생에 대한 통찰이 죽음 직전의 시들에선 가득 배어 나온다.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병을 얻고, 그래서 간을 앓다 올림픽 폐회식날 숨을 거둔 그의 시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 끊이지 않고, 이에 쫓기듯 써내린 원고지들이 피를 흘리는 듯한 시들로 가득하다.

그의 시 전집을 읽노라면, 지랄같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고문당할 일은 별로 없으니...),

미국놈들은 황새울로 병력을 옮기고, 북한은 긴장하여 오늘 핵실험을 해버렸다는 시끌벅적한 뉴스는 아직도 언제든 잡혀가서 고문당해 병신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우리를 지켜주는 잔혹한 나라라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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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10-0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영혼이 자유로이 육체를 벗어나
자아의 허울이 문득 벗겨져버린 내면의 깊은 소리를 따라 써내려간 글들...
그의 글을 읽으면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의 이마를 짚어다오... 무척 좋더군요,..

글샘 2006-10-1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나의 이마를 짚어 다오.
저 외로움을 견디기 두려워서라도 건강해야겠습니다.
자아를 벗어던지는 길은 많기도 하겠습니다.
점심 먹고 유엔공원 한 바퀴 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