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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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였다.

겨울이 쓸쓸한 나라 독일의 문학을 연구하는 한 교수가

시간날 때마다 시인의 집을 탐방하면서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절은 가난했고, 세상은 혼탁했고,

사람들은 잘 아프던 시절이었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 본다.

(휘청인다, 파임이 깊다.)(66)


트라클과 파울 첼란은 낯선 이름들인데,

작가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으며 가다 보면,

인간사의 고독도 발자국들 위에 얹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다스해 진다.


독일어는 그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나라의 언어이고,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을 말살하려 한 살인자들의 언어였지만

그에게는 모국어이고 또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즐겨 읽었던 문학 언어였다.(90)


아, 이런 아이러니를 만나는 일은 가슴 아프지만,

또 문학이 아니라면 이런 절절한 아이러니를 어찌 접할 수 있으랴.


죽고 나서도 수치는 남아있을 듯 하다.(소송의 마지막 문장, 147)


카프카도 등장한다.

내가 카프카의 소송을 읽던 때는 아마도 저 추악했던 9년의 어느 그늘이었을 게다.

정말 죽고 나서도 수치스러웠을 기억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 역시 그러할지 모르겠다.

세상은 그런 것인지도...


넌 그럼 안 돼, 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시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쿤체, 예술의 끝, 185)


블랙리스트야말로 예술의 끝이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예술조차 캄캄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충분한 백분의 일 초들이 있기를 빕니다.(쿤체 대담 중, 201)


아, 인생에서 소중한 백분의 일 초들이... 그렇구나.

행복은, 문학은, 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구나. 아닐 수도 있구나.

그저 백분의 일 초, 느낌을 받는다면, 그런 것이구나... 싶다.


늘 열린 문 하나를 찾아 헤매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망설였다.

언제나 완강하게 앞을 가로막는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닫힌 것은 늘 벽이 아니라 문이었을 것이다.

열릴 가능성이 없는 것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오래 닫혀 있었던 만큼 더 찬연하게,

방금 어느 땅 끝자락 쯤의 강가에서 내게 열려왔던 문 하나.

어느 눈 내리는 저녁 내가 섰던 외딴 마을의 '해뜨는 언덕'에.

이제라도 열려올 한 문이,

그렇게 열려질 한 세계가 있는 듯...(221)


릴케를 이야기하려는 초입의 떨림을 쓰는 부분이다.

이런 연애편지가 또 있을까.


우습다.

내가 여기 내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나, 스물 여덟 살이 되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말테가

나는 여기 앉아 있으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생각한다. 오층 높이에서.

어느 잿빛 파리의 오후에 이런 생각을(271)


릴케의 '말테'다.

그 뜨거운 열정과 삶에 대한 자각을 저렇게 기록했다니...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느껴지는 듯 하다.


시인의 열정은 그침이 없었다.

세상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분노와 역사에 대한 성찰도 여전히 그침이 없었듯.

시인이란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 세상을.(290)


하이네 이야기다.

사람과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는 글을 쓰는 시인.

그러나, 그런 시인들을 찾아 읽고, 그의 흔적을 찾아 더듬는 작가 역시,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글쓰기 역시, 그런 사랑에서 비롯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모든 예술은 예술 중의 예술, 삶의 기술에 기여한다.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를 책임으로 이끌어야 한다.(325)


브레히트다. 아, 독일어로 글을 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있었구나.


감사함을 모른다면 

네가 나쁜 사람이고

감사함을 안다면

네 형편이 나쁜 것이다.(377)


아, 참 힘든 것이 문학인 모양이다.

이런 촌철살인은 역시 괴테다.


빛나는 혜안들과, 

역사 속에서 번득이던 지혜의 글들을 만나게 되고,

삶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힘들었구나... 하는 위안도 얻게 된다.


힘든 전영애 작가의 발걸음들 덕에,

아니, 즐거웠을 그의 여행들 덕분에,

연휴를 느긋하게 독일과 함께 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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