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알라딘에서 이 책의 리뷰를 읽고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열심히 찾았다. 학교 도서관에는 산도르 마라이의 이혼 전야만 있고 이 책은 없었고, 도서관에서는 늘 대출중이었다. 이번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는데 이미 그 표지가 손때에 절어서 테이프까지 붙여 둔 낡은 상태였다.

겉표지의 여인이 감춘 감정이 열정이라는 듯이 표지는 독자를 끄는 힘이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다 보니, 낡고 오랜 성에 웬 장군 출신 노인이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오로지 노인의 시선으로 노인의 모놀로그(독백)로만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 노인은 추억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듯이... 더욱이 유모 니니의 존재는 잿빛 스토리를 더욱 그레이 톤으로 바래게 만든다.

41년 만의 친구의 등장으로 지루하기 그지없던 노인의 이야기에는 탄력이 붙고, 드디어 스토리가 개입하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열정>이 불붙는다. 그 모놀로그에는 철학이 담기고, 오랜 삶을 반추하며 털어 놓는 회한과 의문이 쏟아지는데... 이 책의 뒷부분 1/3을 차지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읽기 위하여 지루함을 조금 참고 앞의 2/3를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있는듯한 인간의 분류와 사랑과 질투, 인생의 덧없음이 교차되며 직조하는 <열정>이란 직물에는 오로지 헨리의 모놀로그라는 실만 부려쓰는 작가의 노회함이 돋보인다.

아가사 크리스티 류의 추리 소설처럼, 친구 콘라드의 시점으로 본 모놀로그도 삽입되고, 거기에 이미 죽어버린 크리스티나(난 크리스티나를 읽으면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가진 박진감과 크리스틴 다에가 지닌 신비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가 기록한 노란 일지의 진실마저도 부가되었더라면 이 소설은 통속하기 그지없는 러브스토리로 전락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글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충동에 대한 오성의 승리를 선포하고 죽음에의 동경을 제어할 수 있는 정신의 저항력을 믿은 시대와 세대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려 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헤세가 보여준 지와 사랑의 한 측면, 즉 <지>로서의 화자로 헨리를 선택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인간들이 처한 상황을 깊은 뜻 없이 기계적으로 정의내리는 낱말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 두 사람처럼 모든 것이 끝나는 경우, 그런 낱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기만, 부정, 배반..." 이같은 대목은 뜨거운 연애담을 깊이있게 만드는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삶이란 것은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존재들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으로 엮어지며, 그 동경은 동류임을 확인한 존재들끼리 교류하는 것을 바라보는 이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역정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 소외시키고 마는 <지>의 오성은 고독하고 퇴색한 잿빛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 <서로 다름>에 이끌리고, <서로 다름>에 상처받는 인간이 만든 작품이 <2분법>이란 것이다. 지와 사랑을 나누고, 이성과 예술로 나누고, 혈액형별로 기질을 나누고, 히포크라테스처럼 기질을 구분한다. 점액질인 사람과 다혈질인 사람은 서로 끌리면서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다르다>를 써야할 경우에 <틀리다>를 쓰는 경우가 많다. 틀린 그림 찾기에서부터 '나는 너와 생각이 상당히 틀려.'처럼 쓰고 있기도 하다. 다른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표현이지만, 틀렸다는 말은 가치를 포함한 용어다. 산도르 마라이는 계속 대답을 요구하다가 독백으로 점철하고 끝내 독백으로 마치는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열정에서 비롯된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지나갈 것임을 <지적>으로 통찰함으로써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그의 내부에서 <지>가 <사랑>을 맞아 승리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산도르 마라이를 찾아 읽으며 이 가을을 보냄도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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