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카지마 야츠시를 요절한 천재작가라고도 한다는데, 사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의 걸작은 이런 곳에 숨어 있기도 한 것이다. 인재도 숨어서 평화롭게 살듯이...

나는 삼국지를 별로 즐겨 읽지 않는다. 두어 번 읽어보긴 했지만, 피비린내나는 써든 어택의 전장을 나는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의 인물들은 삼국지같진 않으면서, 삼국 유사를 떠올리는 사람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이 책은 중국 사서에서 걸어나온 이야기들을 쓴 것인데, 역사라기 보다는 작가의 감성이 흠뻑 배인 글이 매력적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하지만 억지스럽게 지어내지 않는다는 서술 원칙이 오히려 인물들에게서 짙은 페이소스(정념)을 자아낸다고 하겠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산월기이다. 다소 판타지 소설인데, 인간이 동물인 이상, 호랑이라고 하나 멍멍이라고 하나 거기서 거기다. 다만 호랑이가 되어버린 인간의 외로움을 나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대에서 키 180 이상의 헌병들과 근무하면서 내 170의 정상 신장은 한없는 무력감을 주고 말았던 경험처럼,
쭉쭉빵빵 8등신 성형 미인 앞에서 툭튀어나온 이빨과 작은 눈, 광대뼈를 거울에 비춰보며 견적을 고민하는 취직앞둔 여학생이나,
남들은 그렇게도 쉽게 척척 맞추는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학생들의 좌절감이나,
수능보다 높다는 공무원 시험 앞에서 매번 작아지기만 하는 장수생의 비애 같은 것.

징그럽고 지긋지긋한 인간들의 사이에서 소외되어버린, 그러나 그 인환의 세계가 마냥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한다.

사마천과 이능, 소무의 <쿨한 세 남자> 이야기, 이능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세 남자를 그토록 쿨하게 서술한 나카지마도 대단히 쿨한 남자다. 난 남자지만 쿨한 남자를 좋아한다.
끈적거리는 남자, 질퍽한 눈빛, 난 그런 사람 정말 싫다. 사실 이 책에서 나카지마의 수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절창은 <이능>이 아닐까 한다. 이런 책을 가지고 투표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냥 내 기준으로 제일 맘에 든다.

제자에서 자로와 공자는 슬프다. 자로처럼 벌떡 교사를 도륙하고 젓을 담그던 시대가 아직도 여전하다. 공자는 젓갈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는데... 나는 젓갈을 좋아한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사람은 고금을 막론하고 백안시하는 것이 냉엄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목을 걸고 그렇다고 한다.

명인의 수준. 이가 커다랗게 보이고, 나중엔 활을 쏘지 않는 경지.
명인의 경지란 어떤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는, 어찌 보면 가장 일본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작품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한 진한 단면이 명인에 나와있어 보여서...
우리에게 없는 철학의 하나인데... 아니,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잃어버리고 만 명인의 추억...

인생은 아무 것도 이루지 않기엔 너무도 길지만,
또 무언가를 이루기엔 너무도 짧은 것.

이 주제를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한 생각할 거리와 함께 우리에게 들려주는 책.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쿨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이 가을 인생을 궁리하게 한다. 사는 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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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10-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자로와 공자의 관계... 참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글샘 2006-10-0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은 재미있다기 보다는 뭔지 삶의 진한 고뇌를 담은 냄새가 폴폴 풍기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