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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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내 집도 내 집이 아니다.

집, 국가, 풍경, 몸의 왕국은 이제 내겐 낯설고 이국적인 것이 되었다.(142)

 

이 책은 치매에 대한 이야기이고,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고,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면서,

무척이나 상냥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훌륭한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157)

 

번역인데 번역의 어색함이 없어서 오히려 어색하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오히려 이상하다.

 

어머니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구를 땄던 그 해 여름 이후로, 어머니는 매번 다른 사람이었다.(333)

 

어머니는 행복한 아이였다.

얼마 후에는 자주 넘어지는 길 잃은 아이가 되었다.

그 다음에 어머니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점점 말이 없어지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337)

 

한 단계를 지나가면 더 곤란한 사람이 되는 병, 치매.

국가가 관리하겠다고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좀 안심이 되지만,

당사자에게도 가족에게도 치매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질환이다.

 

시인 마차도의 꿈.

자기 심장 속에 벌집이 하나 있고

벌들이 나의 오래된 실패들을 가지고 꿀을 만들어 내는 꿈.

실패는 쉽게 찾아오지만 그걸로 꿀을 만드는 일은 그보다 어렵다.

 

이 책은 쉽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더 풍성해졌던 과정에 대한 기록이고,

그럴 수 있게 도와주었던 우정과 친절함에 감사하는 마음은 전체에 흐르고 있다.(감사의 말)

 

누구에게나 실패는 흔하다.

그걸로 꿀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 멋진 비유다.

 

미로는 미궁과 정반대다.

미궁은 하나의 복잡한 길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이며, 때로는 중심도 없다.

그 안에서 헤맴은 긑이 없고 최종적인 도착지도 없다.

미궁이 대화라면,

미로는 주문이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미로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꺾이고 뒤틀린 곳에서 길을 잃게 마련이지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된다.

미로 속 여정의 끝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한가운데가 아니라 다시 입구로 나오는 것이다.

출발했던 곳이 또한 진짜 끝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례나 모험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집과 같다.

미로 안에서는 볼품없던 모퉁이나 여백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여정은 어딘가로 들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 나오는 여정이기 때문이다.(277)

 

비유도 재미있다.

여러 가지 신화의 이야기들을 곁들여 비유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259)

 

지진과 삶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가슴이 울린다. 좋은 글이다.

 

어머니는 나를 거울로 생각했지만,

거기 비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울을 탓했다.(42)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사작하며, 텅 빈 자리만 남았다.(24)

 

부제가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로 되어있다.

멀고도 가까운 사람,

멀고도 가까운 기억,

멀고도 가까운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들로 읽을 수 있다.

 

아련하고 아슴아슴하다.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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