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 삶의 끝에서 헤닝 만켈이 던진 마지막 질문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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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하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머릿속은 온통 코끼리 뿐이라 한다.

 

안철수가 스스로 '엠비 아바타, 아닙니다.', '박지원 상왕, 아닙니다.', '갑철수, 아닙니다.' 했다는데 ㅋ

코끼리는 계속 생각나고, 1+1도 생각나는 게 인지상정이다.

 

헤닝만켈이 암에 걸려 1년 10개월 투병하다 사망했다.

20개월 남짓되는 동안, 머릿속에는 얼마나 코끼리가 가득했을까.

그렇지만, 그는 쓰고 읽는 노력을 통해 코끼리를 몰아내기도 했다.

멋진 사람이다.

 

암에 걸려 산다는 것은

아무런 보장없이 산다는 걸 의미한다.

밤에 캄캄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의 목적지를 알 수 없듯이,

암세포 역시 조명이 어두운 길을 돌아다닌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지만,

세상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수정해야만 한다.(401)

 

나는 본능적으로 '덧없음'이란 낱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뭔가 불분명한, 죽음을 죽음이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423)

 

하염없이 떠올랐을 암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상상하기 힘들지만,

아픈 사람을 곁에 둔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황망함에 공감하는 일이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그의 회상은 일상과, 사회 역사 모두를 넘나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뒤를 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여러 방식으로 경험한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과 마찬가지.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암에걸린 이후, 뭔가 예상치 않았던 것을

점점 더 자주 발견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271)

 

힘들겠지만 꼿꼿하게 자기 상념의 줄기를 기록하는 그의 의기에 존경심을 보낸다.

 

우리는 항상 희망을 절망보다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희망이 없으면 사실 생존도 없다.

암환자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마찬가지.(119)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원고 투고를 하고 출판 승낙 엽서를 받았던 순간의 느낌은 정말 생생하다.

 

옷도 안 입은 채 편지투입구 앞에 서 있었고

맨발 아래 바닥이 차갑게 느껴졌었던 게 기억난다.

따뜻한 물줄기처럼 내 몸을 적시던 큰 안도감이 기억난다.(255)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

이것이 감각으로 형상화되니 참 생생하다.

 

암이 걸린 지금은 방향을 잃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된다.

나는 입구도 출구도 없는 미로 속에 있다.

중병에 걸렸다는 것은, 자기 몸에서 더이상 스스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265)

 

어린 시절 지름길을 찾다 길을 잃은 느낌을 이야기하다

암에 거린 지금으로 시간이 펄쩍 뛴다.

 

영원과 영원의 순환은 어디에나 있다.(109)

 

화장터의 연기 분자들이 뒤섞일 것을 상상하면, 글쎄, 마음이 쎄하다.

 

몇 년 후에는 나도 완전히 잊힌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끔은 신경이 쓰인다.(122)

하지만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으로 예정된 원시 암반 안에서는

아무것도 녹슬거나 풍화하지 않을 것이다.(124)

 

죽음에 대한 상념 사이에서,

핵폐기물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문제를 제기한다.

 

식민주의의 알려지지 않은 무기는 거짓말이었다.

19세기,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진행된 모든 침략과정에서만큼 많이,

그리고 체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경우고 과연 또 있을까.(365)

 

그의 소설들에서 전개되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잔인한 흉계는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가족은 무한하다.

설사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순간에

우리를 스쳐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더이상 알지 못한다 해도.(453)

 

암에 대해 취할 태도를 찾는 것은

여러 구간의 전선에서 한꺼번에 진행되는 전투와 같다.

너무 많은 힘을 거기에 낭비해버리지 않는 것.

의미없는 환상들과 치고받으며 힘을 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에 침입해 들어온 적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데 나의 모든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림자의 모습을 한 풍차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온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다.(173)

 

삶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른 그가

돈 키호테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책도 읽히지 않는다는 고뇌를 털어 놓으며,

그만의 비법을 알려준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더 책이 필요한 이때 나를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을 펼치자 단어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내가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이었다.(188)

 

암과 싸우면서도 정신을 올곧게 간직하려 노력한 사람으로서,

사람으로 산다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간절하게 필사한 책도 드물 것 같다.

글자를 읽기보다는

유언을 만나러 매주 그를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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