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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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면

나무에서 뾰죽 솟아나는 봄눈들과 만날 수 있고,

분노스러운 마음과 실망스러운 마음도 주무를 수 있어 좋다.

세상사 누구나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 숙이고 걷고 있다는 걸 보게 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기록한 것으로 가득하다.

굳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즐겁다.

아니, 한발짝 걸어 나가서 같이 걸으면 더 즐거울 것이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8)

 

삶은 우리를 슬프고 괴롭게 한다.

그럴때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아 왜소하다 느껴지고 의기소침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비껴나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만나면,

뭐 의기소침하고 두려울 것도 없다.

남을 아프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니...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16)

 

죽음과 고독에 대하여,

누구나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인지상정이다.

인생은 무상하다.

헤닝 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서 가득한 죽음을 앞둔 소회도 낯설지 않다.

 

호저 : 난 정말 기분이 좋아.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도 얼마나 멋지게 살 수 있는지 넌 상상하기 힘들겅.

난 내 외모가 멋지다는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확신하고 있어.(52)

 

호저는 이제 만족하는가.

그건 비밀이다.

비밀이란 원래 특성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설명하기 힘든 일은 흥미롭다.

흥미로운 일은 마음에 든다.(55)

 

황새와 호저의 대화 중,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호저의 편에서 이야기하는 작가는 재미있다.

산책은 이런 생각을 궁글리기 좋은 시간이다.

 

희고 드넓은 고요가 초록빛 투명한 고요에 싸여있다.

그것은 호수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숲이다.

그것은 하늘, 창백하게 푸르고 살짝 우울에 잠긴 하늘이다.

그것은 물, 하늘을 그대로 닮아서 물이 오직 하늘이고 하늘은 오직 푸른 물인 듯이 보이는 그런 물이다.

달콤하고 푸르며 고요한 아침이다.(123)

 

대지를 즐기세요.

겁내는 자는 아무것도 즐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두려움을 떨쳐버리세요.(127)

 

두려움을 버리고

겁내는 자세를 극복하면,

비로소 산책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라.

좋은 날은 그 다음에 오리니.

좋은 날은 항상 우리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인내심이 장미를 피운다.(166)

 

봄이 오면 장미도 피는 법이니...

 

자신의 작은 섬으로 간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굴곡진 길을 걸어간다.(189)

 

나는 결코 백치가 아니고 이성적 감수성이 발달한 편이다.

백치 역할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난 때때로 책을 좀 많이 읽는 편이고, 그게 전부이다.(240)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조금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물집 잡힌 발을 조심조심 딛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걸음은

자신의 마음을 자기의 작은 섬으로 이끈다.

번역자는 '매혹되었다'고 펄쩍 뛰지만,

이 책은 조용하다.

하긴, 조용한 사람에게 매혹되었다는 사람도 있을 법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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