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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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은 매혹적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보통 줄거리를 따라가기 쉽지 첫 문장에 집착하지 않는데,

김정선의 이 책 덕택에

소설 첫문장을 찾아읽는 법을 배운다.

 

바람이 분다. 순간 깨닫는다.

바람은 부는 순간 이미 떠나고 없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 뿐.

, 바람이구나 하고 느낄 때면 이미 바람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바람이다.(65)

 

이렇게 재미있는 감상도 들어 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김훈, 칼의 노래)

 

이 첫 문장은 기억에 많이 남았다.

이방인의 첫 문장처럼 인상적이다.

버려진 섬도 아련하고, 그 섬들이 여럿이어서,

섬마다라는 말도 애잔했는데,

사람이 다 죽어 버려진 섬에 꽃이 피었다니

이 한 문장으로 시가 되었다.

 

덧붙인 이야기도 예쁘다.

이 책을 도란도란 읽는 사람들이라니...

 

-꼬노 나가이 톤네루오 누케루토 소꼬와 유키구니닷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눈의 나라였다.

 

일본어 연수를 받는데, 유키구니의 첫구절을 가르쳐 주었다.

문학은 번역할 수 없다.

저 일본어 발음을 도막도막 내뱉을 때,

또는 '나가이 톤네루오 누케루또,'의 쉼표 지점에서,

기대감과 기다림,

그런 것을 헤치고 나온

소꼬와 유키구니 닷다...는 벅차다.

 

언어를 배우는 만큼,

많은 세계를 경험한다는 말을 알겠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최인훈, 광장)

각자 따로 놀면서도 쉼표를 통해 묘하게 이어지기도 하는...

 

광장에서 이런 멋진 구절을 읽어내지 못한 나도 참 무심하지만,

그걸 읽어내는 작가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쉼표를 통해 묘하게 이어지는, 구절들.

 

그일에 대해 나는 굳이 알고자 하진 않았지만 결국 알게 되었다.(하비에르 마리아스, 새하얀 마음)

, 이러면 안 되는데...(다케우치 마코토, 도서관에서)

    

이런 구절들을 만나면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겠다.

 

모든 건 잠시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물거품 같은 일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프레데리크 베그베데, 9,900)

      

모든 게 달라질 거야.(카타리나 하커, 빈털터리들)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에 일요일 오후는 나쁜 시간이다.(프란세스코 미랄레스, 일요일의 카페)

    

시작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숨을 골랐을지,

그 호흡을 생각하게 하는 책.

 

하늘나라도 나라는 나라일 테니 나는 다시 국민이 되는 것이리라.

죽고 나서도 또 그 지긋지긋한 국민으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감옥이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감옥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신선할 것도 같고.(49)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게가공선)

아저씨 감옥에서 나왔죠.(나비잠)

 

사는 일은 지옥이고, 감옥이면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그 벗어난 곳의 언어 또한 '천국'이거나 '하느님 나라'라면,

재미없다.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편혜영, 재와 빨강)

 

삶은 유한하고

일회적이어서

늘 당황스럽고 주저하게 된다.

 

인간은 늘 부족하고 엉성하다.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쩌다 부모가 되고, 어쩌다 어른이 된다.

 

소설은 그 엉성함에 대한 변명이자 실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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