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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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부분)

 

섹스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가령, 이런 시를 보면 그렇다.

 

호명되지 않은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 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슬픈 빙하시대 1, 부분)

 

어떤 조직의 안에 오래 있으면 익숙해 진다.

모난 부분이 거칠게 마찰하며 서걱대던 시간들이 닳아 가면서

부드러운 그러나 좀 지겹고 나가고 싶은 기분으로 차는 시간이 온다.

그래서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서걱대는 시간들을 맞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있다.(나쁜 소년이 서있다, 부분)

 

젊은 날은 푸르다.

꽃을 떨구고 광합성에 열중인 갈맷빛처럼

푸른색은 흐르고, 기억으로 남는다.

나쁜 소년은, 그 기억의 총평일까? 반성일까?

 

외부자(아싸)로 지내던 슬픈 빙하시대를 지낸

그런 푸른 시절을 돌아보면 스스로 나쁜 소년이었던 것으로 자괴감이 드는 걸까.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슬픈 빙하시대 2, 부분)

 

요즘 아이들 말로 복학생 선배를 '화석'이라 부른다.

속된 말로 '대가리 피가 마른' 노땅이 되면

거시기 대가리에 피가 마르면 꼴리지도 않아 '불혹'의 나이가 되면 '지층' 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열병 앓는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한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았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검은 지층의 노래, 부분)

 

지층으로 불리는 시절이 오면,

그 노래들을 추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어느 마른 날,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지층의 황혼, 부분)

 

지나간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 지층이 되어 켜켜이 시루떡같은 증거를 남긴다.

그게 삶인지, 스스로 나쁜 소년이라면서 노래부른다.

 

이제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햇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의 전부라는 걸.(멸치, 부분)

 

요즘 드라마를 보면 범죄 스릴러물이 많다.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사이코패쓰들을 추적하는 이들은

또한 괴물이 되어간다.

 

그걸 만드는 방송국이나 시청자들이나 모두 말라가는 인간들이 아닌가 싶어 섬뜩할 때가 있다.

국정을 파탄내고 탄핵된 주제에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삐쩍 마른 멸치같은

어떤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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