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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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방에서 그의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그의 오프닝 멘트 모음을 읽은 적도 있는데, 시집이어서 찾아 읽는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저녁의 호명, 부분)

 

아재개그처럼 유사한 발음도 아닌데,

두 자음의 유사함이 아득한 거리를 표현한다.

슬픔이 아름다운 걸 비애미라고 한다.

삶이 비애미로 가득한 세상이다.

 

뭍이 물을 들이는 저녁의 멀미

물이 나를 삼킨다

이런 종류의 멀미를 기억한다

불린 듯 마루에 나와 앉아 울던

물금이 처음 생긴 저녁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하현의 발꿈치

맨발이 시리다

물이 온다(물이 올 때, 부분)

 

물, 저녁, 물금... 하현, 이런 말들은 여성을 떠올리게 하고,

울음...은 시인의 기본 심상인 듯 하다.

시인만 그러랴. 삶이 언제나 울음으로 가득한 것임을...

시를 통해 다시 깨닫는다.

 

너는

거기 앉아

죄 없이 눈부시구나

 

이 멀고 억울한 향기

나는 알지

네 몸 냄새

캄캄한 향기(제망매 - 흰 꽃들의 노래, 부분)

 

이제 나도 알겠다.

캄캄한 향기를, 캄캄해진 몸 냄새의 억울함을...

 

여성의 목소리, 사투리를 쓰는 이의 목소리를 통해

삶의 비애를 대변하는 시도 많다.

 

젖이 많아 갖고 웃물 짜서 한 양재기씩 내 놓으문

할머이가 쇠죽에도 붓구 국묵에도 붓구,

샘물에도 갖다 쏟아붓구 그랬어.

굴묵에 연기 나오듯이 젖 많이 나오라구.

샘물에 붓는 거는 부정 타지 말라구.(유전, 부분)

 

아이엠에프 때 갈라서고 안 해본 일이 없어유. 

입원했을 때, 지가 보호자 한다구,

아 근디 이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갔으니 미치겠어유.

그래도 억울한 거는 풀어줘야 딸 보러 갈 명목이 서지 않겠어유?

(목에 걸린 학생증을...) 명색이 아빤데(보호자, 부분)

 

시는 구체적이지 않다.

파편적이고 이미지적이다.

그렇지만 학생증, 아빠, 이런 단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렇게 다들 이 시대를 앓고 섰다.

 

한 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버티는 힘은

세월호에 대한 부채감이 아닐까?

용산에 대한 부채감도 있고, 쌍차에 대한 부채감도 거들지 몰라...

분노로는 그렇게 할 수 없거든.

 

들썩이는 치열

나는 나로부터 멀다

습성은 문득 낯선 얼굴

 

이후는 다시 이전이 될 수 없다

 

킁킁, 이 냄새는 뭔가(입덧, 부분)

 

페미니즘이라는 말에는 쌍심지가 돋아 있다.

모성이라는 말에는 착취자의 음흉한 심사가 들어있다.

 

그렇지만 둥근 무엇이 여성 안에 들었다.

여성인 시인은 그런 것을 그린다.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응은 둥글다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둥긂은, 부분)

 

페미니즘 같은 말이야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노동자 해방도, 신자유주의도,

그런 말들 다 없는, 개념 이전의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석 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가 되어 살면 될라나...

에혀, 매화가 피었으나

쌀쌀하고 쓸쓸한 봄날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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