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가계 -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
이상하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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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가계는 가난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주자가 친구 여조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서와 사서를 함께 공부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먼저 경서에 뜻을 두게 하는 편이 좋을 듯하니,

사서는 요열하고 경서는 냉담하네.

후생들은 심지가 안정되지 못해 바깥쪽으로만 쏠리지 않을 사람이 드무니 이 점을 미리 방비해야 하네.(206)

 

사서는 사람의 이야기일 터이니 후끈 달아오르는 감정을 느끼게 하고 열정적 독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으나,

경전을 읽는 일은 심심하고 재미없을 수 있으니 그편을 강조해야 한다는 말이렷다.

세상이 지랄같을 때는 원칙적인 책을 읽고 있을 수가 없다.

시답잖은 사람사는 이야기가 끌린다.

한국 영화가 대부분 폭력배들 이야기인데 그것이 인기있는 것도 세상이 지랄같아서인 모양이다.

 

글을 읽을 때 선입견이 아주 없기는 어렵다.

오래 연구하고 생각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자기 견해에 맞는 글을 발견하면 마음이 기뻐지고

자기 추측과 다른 글을 보면 이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젓게 된다.

자기 주장이 강한 상태에서 고전을 읽으면

자기가 고전을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전을 자기에게 맞추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렇게 하려거든 차라리 자기 생각대로 글을 쓸 것이지

무엇아러 애써 옛 성현의 책을 읽는가."(218)

 

글읽기는 어렵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심드렁하기도 하다.

세상이 워낙 빠른 속도로 변하다 보니 옛글을 시답잖게 여기기 쉽다.

삶은 늘 그런 모양이다.

 

세상은 거대한 물결이요,

인심은 거대한 바람인데

미미하기 이를데 없는 나의 일신이

그 속에서 가물가물 흘러가는 것이

마치 작은 일엽편주가 드넓은 물결 위에 떠다니는 것과 같습니다.(주옹설, 283)

순자에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고 하였다.(285)

 

혼돈의 시기인 고려 후기를 살았던 권근의 주옹설은 현대에도 읽을 법한 글이다.

'설'이란 이야기를 통해 주장을 펼치는 글의 한 종류인데,

그 비유가 읽을 만하다.

 

주자는

물이 불어나면 큰 배도 자연히 뜬다고 했다.

水到船浮

이 말은 진리를 탐구하는 참된 학문의 힘이 쌓이면 애쓰지 않아도 하는 일이 절로 이치에 맞음을 비유한 말이다.(285)

 

무엇이든 자연스레 이뤄지는 일의 합당함을 비유한 말이겠다.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

물이 불어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니.

 

당 시인 백낙천은 시 한 수를 지으면

반드시 이웃 노파에게 가 물어보고 그 노파가 뜻을 알겠다고 하면 기록해두고

모르겠다고 하면 그 시를 버렸네.(244)

 

무릇, 글은 쉬워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도 잘 모르는 말을 배배 꼬아 놓다 보면,

현학적으로 보이기는커녕 원뜻에서 멀어져 버리게 마련이다.

정치가들 역시 누구나 알아듣게 하는 말이 좋은 연설이다.

박근혜처럼 한국어인지조차 모르는 말은 연설도 아닌 것이지만,

최근 안희정 지사처럼 스스로 꼬여버리는 것도 어려운 말을 써서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쉬운 이야기를 잘 했는데, 그것은 큰 능력이다.

그것은 우선 깊이 오래 생각해 본 문제라 그렇고, 줏대가 서 있어서 그렇다.

뭐 그렇지만 '대연정'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같이 꼬인 케이스니, 노파에게 묻듯, 촛불 민심에 좀 물어야 할 듯 싶다.

 

학자들은 자들을 중시한다.

자득은 '스스로 터특한다'는 뜻인데,

주자의 '자'는 독자의 자가 아니라 '자연'의 자인데

학자들은 독자의 자로 알아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

즉, 자득이란 사색하여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

홀로만 아는 게 아니란 것이다.(241)

 

책을 읽는 일 역시 자득을 위한 것이다.

자기만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이치가 드러날 수준에 오르는 것.

그것이 독서의 목표로 삼을 만 하다.

책이 드물던 시절이나 요즘처럼 흔하고 흔한 시절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우리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가

뜻밖의 정경을 만나면 이렇게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20)

 

손석희의 뉴스가 대세가 된 것이 오래 되었다.

뉴스룸의 화룡점정은 '앵커브리핑'이라는 짧은 대목인데,

그 문학적 표현과 대사의 인용이 자못 심오하고 짜릿하다.

 

이런 것이 독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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