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소설을 들고 읽기시작해서 오 분도 되지 않아 당황감을 느꼈다.

두세 페이지 넘기고 만난 '그레이스 씨네 가족'은,

십년 쯤 전에 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휘리릭 떠오르게 했고,

다시 표지에서 정영목이라는 이름을 만났을 때에야,

십년 전에 '위즈덤하우스' 서평단을 할 때 읽었던 책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검색해보니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는 제목으로 된 책이었다는 기억을 만났다.

 

당시에 책을 읽은 기억은 나지만, 리뷰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열심히 읽지 않았거나,

아마도 당시 내가 젊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십년을 늙었다기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어야 이 책을 깊이 읽을 수 있겠다 싶다.

 

아내가 병들고, 죽는 이야기이다.

 

나는 몸이 잠시 들려 해변쪽으로 약간 밀려갔지만,

다시 전처럼 두 발로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저 큰 세상이 또 한번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한 것일 뿐이었다.(245)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는 부분이다.

쇼크일 것 같은 아내의 죽음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화자 역시 죽어갈 것이지만, 뭐 세상은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 하겠지.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나는 수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안해. 두 번 다시는.

누군가 막 내 무덤 위를 걸어갔다. 누군가가.(12)

 

이건 소설의 맨 첫부분이다.

신들이 떠나갔다는 말은, 화자가 죽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시간은 지나가고 바다는 그대로 남는다.

바다는 그대로인 것 같이 보여도, 그 속의 조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철썩거려 시퍼런 멍을 들인다.

 

마치 어떤 비밀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그 비밀은 아주 지저분해서 함께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서로 상대가 아는 지저분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바로 그렇게 아는 것으로 둘은 함께 묶여 있었다.

이날부터 앞으로는 모두 속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이 없을 테니까.(28)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서로 알고 있어 말을 꺼내기 힘들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심각한 질병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부부 사이의 곤란한 심경을 그리는 일은 어려울 터인데...

 

내가 어떤 괴로움을 겪든,

머리카락과 손톱이 집요하게 자라는 것.

이미 죽은 물질의 이런 무자비한 발생은 너무 배려가 없고, 상황에 무심한 것 같다.

위층의 차가운 침대에 입을 벌리고 눈이 흐려진 채 널브러진 주인이 다시는 거칠게 빻은 먹이를 접시에 쏟아줄 수도

마지막 정어리 통조림을 가져오려고 열쇠를 집어들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는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고 동물이 계속 동물로서 자기 할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71)

 

지금도 대학병원의 어느 사무실에선가는, 죽음을 앞둔 가족이 의사에게서 최종 선고를 듣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금세 캄캄하게 닫힐 듯이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사실 세상은 무자비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대로 돌아간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리면서 '그레이스 부인'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하다.

젊은 시절의 파충류같이 본능적이던 그를 그리기도 한다.

아마도 죽음 앞에서 젊은 시절은 참 덧없이 보여서 거기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악마 연인인 동시에 그녀의 아이였다.(87)

 

이것이 내가 어른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던 것이다.

늦가을에 맞이한 기나긴 화창한 날씨같은 것.

고요의 상태, 호기심이 사라진 차분한 상태, 견디기 힘들었던 유년의 날것 그대로의 직접성은 다 사라지고,

어렸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것은 다 풀리고,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모든 질문에 답이 나오고

순간순간이 물이 똑똑 듣듯이 거의 알아챌 수도 없이,

황금 방울처럼 똑똑, 마지막, 거의 알아챌 수도 없는 해방을 향해 흘러가는 상태.(92)

 

박범신이 '은교'에서 노인의 성적 욕구에 대해 간절하게 그리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더 나이들었을 때의 삶이 드러나 있다.

호기심과 날것으로서의 유년시절의 거칠었던 상상들은 이제 스르르 풀어져 버린 나이.

잿빛으로 심심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해방'을 향한 흐름이라도 읽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녀(아내 애나)는 칼처럼 내게 박혀 있는데도 나는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 담긴 그녀의 영상은 이미 가장자리가 닳고,

염료조각, 금박조각이 떨어져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캔버스 전체가 텅 빌까?

내가 그녀를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주 천박하게, 아주 서툴게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탓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게을렀던가?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너무 나 자신에게만 열중했던가?

그래.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 잊음을, 이런 몰랐음을 꼭 탓할 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안다는 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요것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우리가 바랐던 것은 바로 그것,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200)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남자는,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적은 것임을, 알수 없는 것임을 생각한다.

이 책의 잔잔한 무게는 그런 것에 있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며칠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 소설과 같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질병의 진행이 걱정도 되고, 아픈 사람에 대한 안쓰런 맘도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덧없다는 상념들이 하나로 엉켜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것들이 정연하게 적혀있다는 것에 놀라운 생각이 든다.

 

207쪽.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와 똑같은 자세... (Johannes Vermeer, 1632~1675)를 베르메르라고 알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쪽의 발음으로는 페르메이르가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