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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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면 외로움도 깊어진다.(얼음, 7)

 

이 책은 추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 그는 몹시 외롭다.

그가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얼음물에 몸을 적시는 일.

스스로를 가혹하게 매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가혹하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은 의미없다.

이 책은 얼음 - 숲 - 바다 - 동지로 전개된다.

꽁꽁 얼어붙은 주인공이 숲에서 딸을 만나고, 바다는 사람들과 소통하게 한다.

결국은 꽁꽁 얼어붙는 동지가 되는 일이 수미상응하는 듯 하지만

처음의 추위가 '외로움도 깊어라'하는 탄식이었다면,

마지막의 추위는 '함께' 였으므로 웃으며 보내는 날들이다.

 

더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동지, 409)

 

나이가 들면 누구나 늙고, 심하게 늙다 보면 병들어 죽게 마련이다.

더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리고 삶의 궤적에는 다른 사람의 엉뚱한 팔을 자르기도 하고,

훌쩍 아내를 떠나버리기도 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지만,

어떻게든, 그 지점까지 오는 것. 그게 삶이다.

 

이 소설을 가만가만 읽고 있노라면, 눈이 하얗게 쌓인 추운 섬에서,

동그마니 앉은 노인을 상상하게 되고,

나의 삶 역시, 어느 지점까지는 가게 될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악마는 소리를 지르는 반면,

신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위안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 사실 자체가 위안이라는 걸 깨달았어요.(370)

 

날마다 지옥임을 확인시켜주는 뉴스가 풍년인 와중에,

기름장어라는 이가 정치판을 휘젓고 다닌다.

악마의 소리는 웅변이고, 신의 소리는 속삭임이라니...

삶은 위안보다 분노의 연속이기 쉽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그 어느 지점까지 살아가는 것이 삶인 것을...

작은 목소리지만, 신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함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러나 또한 어려운 길인지...

 

의사에게 엉뚱한 팔이 잘린 외팔이 앙네스와의 만남도 지옥이다. ^^

그렇지만 그 지옥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삶은 그런 모양이다.

 

평범한 사람이란 없어요.

그런건 정치가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일그러진 세계상이에요.

그들은 우리를 독자적인 개인이라고 주장할 의지도 없는,

수많은 대중 속에 포함된 그저 그런 한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아요.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평범함에 대해 필사적으로 이야기하지요.

평범함이란 사람들을 무례하게 다루는 정치가들이 대는 핑계에 불과해요.(181)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던 딸 루이제는 정치적이다.

아무 힘도 없으나, 누드 시위를 하고,

목소리를 낸다. 마치 촛불 하나와 같다.

 

몇달 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가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중 몇 명이 이스라엘 해병대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 작품의 저자도 그 구호선에 탑승한 682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옮긴이의 말 중)

 

철저히 정치적인 사람만이 세계를 읽는다.

숨쉬는 일조차 정치적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피해를 입고 보면, 숨쉬는 일이 비정치적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임을 알 것이다.

 

루이제는 당신이 숲을 지나 와주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동안 내내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숲의 오솔길이나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기 쉬운 법이라오.(167)

 

자코넬리로 불리는 구두쟁이의 말이다.

신발은 그 사람의 보행 습관을 그대로 흉지게 담아 내듯,

우리 육신이나 모습 역시 우리의 삶의 궤적을 담아 낼 것이다.

걷고 있으면서도 매일 의심하듯,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게 되는 삶에 대하여...

차가운 공기를 읽으며 따끈한 커피를 마시는 일은 아름답다.

 

"비올 때가 가장 아름다워.

조용히 내리는 스웨덴의 여름비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다른 나라에는 멋진 건물 또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산과 계곡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름비가 있지."

"고요함도."(122)

 

하리에트와 주인공의 대화다.

삶은 결코 아름답지만도, 화려하지만도 않지만,

짧은 순간, 아름다움을 담기도 한다.

어쩌면 짧은 순간이어서 더 탐닉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여름비 내리는 스웨덴처럼,

잠시의 고요함처럼.

 

<키미노 나와>(너의 이름은...)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도,

誰そ彼( たそがれ) 타소가레..라는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황혼이라는 '타소가레'는 일본노래인 와카에서 등장한다는데, '게 누구요?' 정도의 의미다.

상대방을 명확시 인지하기 힘들어지는 시간.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 역시 비내리는 공원을 배경으로 삼았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은 정말 완전히 망가질 뻔했어.

내가 이해할 만한 말을 당신이 해주길 바랐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가벼워졌다.

거짓말은 중량과도 같다.

처음에는 전혀 무게가 없는 듯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하리에트는 시트를 턱까지 끌어 올렸다.

"추워?"

"평생 추웠어. 온기를 찾아 사막과 열대 지방으로 가기도 했지만,

하지만 내 안에는 늘 작은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어.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끌고 다니지.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또 어떤 사람들은 불안을.

내가 끌고 다닌 것은 고드름이었어."(101)

 

하리에트는 숲 속 연못을 보고 싶어한다.

"내가 살면서 들은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어.

정말 유일하게 아름다운."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한 느낌잉ㅆ다.

나는 악기들 한 가운데 앉아 있었고

내 옆에는 현악기들이, 바로 뒤에는 관악기들이...

"사람들은 늘 약속을 받지, 

사람들은 이런 약속 중에 몇 가지나 기억하고 있을까?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황혼 무렵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늘과도 같아.

나이 들수록 더 확실하게 느껴."(56)

 

책 속에서 나를 만난다.

나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긴채로,

그렇지만, 둘은 약속을 지키게 되고,

작은 하나하나의 약속을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이라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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