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지음, 이피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과 그림들은 ‘고독존자 권태존자’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 카페에 약 8개월간 연재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8개월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7×7=49일간 연재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2014년 4월 이후는 무척이나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도대체 영혼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연재하던 글의 제목을 후회하고,

 글을 발설하는 자의 별명(쪼다)을 후회했습니다.

안산에 있는 제가 근무하는 학교(서울예술대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역에 내리면

역 앞에 늘 서 있는 버스에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엔 ‘상담해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바람은 꿈 분석을 싫어한다, 바람은 집중 치료를 싫어한다’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미친 사람처럼 자꾸만 중얼거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난데없는 그런 중얼거림이 다시 연재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말' 중, 387)

 

그렇게 수다처럼 썼던 글이었다 한다.

필명도 '않아'로 바꾸었다.

'가만히 있어라'는 지시에 '그러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이기도 하고,

'나라가 위태롭다'는 겁박에 '난 그걸 믿지 않아'라고 무지르는 뜻같기도 하다.

마치, 조세희의 '난쏘공'의 난쟁이 이름이 '김불이'였듯...

 

그는 비명의 지휘자다...

않아는 해마다 생각한다. 그가 올해에 지휘한 곡이 그중 가장 심했다고.(310)

 

아... 2년 전, 가장 심했다고 썼을 것이다.

세월호... 작년의 메르스... 올해는 최순실...

그러나, 올해 다시 가장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스~로 일관하는 '이스메네'는 세계를 변혁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로 생각하는 '안티고네'가 그래서 필요하다.

난 그의 이름 '않아'가 마음에 든다.

 

불모가 아니라 위로와 비전을 제시하는 게, 시가 아니냐.

사실과 진실을 추구해라...

않아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쉬운 시가 뭔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린다.

선생님, 시는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의 그 불가능성을

추구하지 않나요?

진실이라고 하는 것,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막상 추구해 보면,

없는 것 아닌가요?

그 추구 자체가 시 아닌가요?(267)

 

시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막상 진실과 사실을 시로 말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그 추구하는 몸짓, 그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

 

시를 쓴다.

그 사라짐 속에서 쓴다.(사라지는 장르)

 

시는 사라지고, 시인, 풍문, 잡지, 효용...만 남은 시대.

시인들도 자꾸 동화나 에세이를 쓰는 시대.

그는 그런 어떤 쓸모나 효용보다, 무언가가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도 시로 써야한다고 느낀다.

'희미'한 '황홀'을 쓰는 것이 시인 모양이다.

 

해마다 몇 번씩 아직도 살아 있으니 부끄럽지 않으냐고,

슬프지 않으냐고 채찍질 하며 묻는 나라, 애록에서 산다는 것.(121)

 

애록, AEROK은 뒤집힌 코리아다.

자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모국.

그 징상스러운 마음을 애록으로 쓴다.

 

그들의 혁명의 덕을 보고 사는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들이 가난한 나라를 찾아가 겸손하다못해 자의식조차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을 찍은

인물 사진이 싫다.(213)

 

박노해 류를 일컫는 말이다.

나도 그렇다.

 

시쓰기는 가르칠 수 있을까?

가르친다기보다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혼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더불어 생각해봐야 할 것을 서로서로 나눕니다(189)

 

모든 일이 그렇다.

교육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더불어 사노라면, 교육이 거기서 피어난다.

 

마그리트는

모자 장수 엄마가 열네 살에 투신자살하고,

아내 조제트의 치맛자락을 평생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58)

 

그러고 보니, 마그리트의 그림엔 늘 모자에 하늘과 구름이 짓쳐들어갔다.

 

내일은 갔다.

어제는 올 것이다.

 

죽음은 태어났다.

탄생은 멀었다.(아직 오지 않은 과거, 전문)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제한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다.

나를 중심에 놓고 바라본 것이다. 유아론적인 시선.

 

말장난같은 시간의 도치가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한국의 미래가 있을까 하는 우려와,

지옥같은 유신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은 불안과,

죽은 줄 알았던 친일, 독재의 망령이 태어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 환멸과,

바라는 세계에 대한 희망은 멀었을 마음이 느껴진다.

너무도 좌절스러워, 황지우 류의 '내가 너에게 간다, 멀리서 오는 너에게 아주 천천히 오래...'같은 용기는 없다.

 

도마에 칼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어떤 어머니의 자식들을 않아는 싫어한다.(3)

 

뒤집어 보고, 생각해 보는 시.

밤늦게 놀다가 아침나절이 되면 부엌에서 웅성거리며 무이징게국 냄새로 기억나는 명절 아침은,

백석이 남자여서 쓸 수 있는 시였을 것이다.

그 당시 여성에게 명절 아침 부엌은,

가사노동의 극단과 여성 서열의 틈새에서 피하고 싶은 아침이었을지도...

 

인생이 연결 고리에 주르르 꿰어지지 않을 때

개를 끌고 길거리에 무료히 앉은 아이가 세상 전부를 봐버린 그 순간,

그 막막한 느낌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바퀴살 가운데 둔 것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 부재를 생산하는 행위.(23)

 

시 선생님의 시론은 텅 비었다.

그렇지만, 꽉 찬 자리보다

텅 빈 자리의 시가 더 심장을 아릿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피의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