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혜린이

그 가난하던 시절에

독일서 유학하던 이야기를 썼던 것이 한때 열병을 앓게 했다.

이제 외국은 별세계가 아닌 시대에,

독일의 알자스 지역, 뮌스터란 도시에 사는 시인이 도시를 걸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론 시적이고 때론 사춘기 소녀처럼 수다스럽기도 한데,

역시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죄업과 독일인의 반성이 무겁다.

일본인이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것은,

마치 박근혜를 감싸안는 주하가 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상의 결과다.

 

많은 잊음 가운데 가장 공포스러운 잊음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폭력은 바로 그 순간에 나온다.(198)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92)

 

한국 전쟁이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다.

맹자가 인간다움의 네 기본으로 인의예지를 들면서

그중 첫번째 '인'이 '측은지심'이라 풀었다.

누구나 측은히 여겨야 할 인지상정을 잊은 자리,

그 세월호의 비밀에 박근혜가 놓여있고, 국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부자 됐으니 고만 하라, 니 딸이 오뎅으로 돌아왔다...는 일베 역시 국정원과 관련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참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것이 폭력이다.

 

물대포를 직사하여 농민이 중태이다가 죽었다.

온갖 잡소리가 또 들끓는다.

대통령 전임 주치의(그것도 무려 산부인과?)가 낙하산타고 온 서울대 병원에서 농민을 병사로 규정한다.

그럼 강도가 죽여도... 심장마비로 인한 병사구나.

인간적이지 못하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올바른(=right, 우익) 역사교과서'라는 국정교과서에서 말살될 것이다.

현대사는 억울한 죽음의 떼무덤이다.

조선 후기, 동학농민군부터,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죽어간 군인들, 징용자들, 여성들,

해방 공간에서의 죽음, 암살과 이승만 박정희의 사법 살인,

민간인 학살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숱한 죽음들, 제주도의 학살과 보도연맹, 국민의용군...

한번이라도 <인간적인> 반성을 얻지 못한 원혼들은 이 땅을 온갖 살기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아닐까?

 

빠른 시간 내에 최대의 결과를 얻어내야만 하는 시대정신에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우울.

빨리 해치우지 못하는 일이 진득한 책읽기이다.

하지만 어쩌랴.

저 별 같은 이름 모를 수많은 책들이 누군가 와서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도서관.

내가 발굴하지 않으면 도서관이라는 무덤 속에서 사라질 책들.

읽기와 쓰기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작은 항의.(203)

 

도서관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도, 세종문화회관 옆,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빠리의 미테랑 도서관처럼... 멋진 도서관 하나 가졌으면...

독서가에게 레드 카펫을 제공하는 우아한 책점...

 

 

 

책 모양 디자인 국립도서관(파리)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할까.(33)

 

어느 거리에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다.

제주의 고샅길 '올레'에만 이야기가 담긴 것이 아니다.

1988 쌍문동의 골목길에도 이야기가 있고,

2016년 광화문 광장에도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예술가 하면,

슈베르타와 괴테가 생각난다.

 

'보리수'는 아무리 방랑을 거듭해도

다시 돌아오는 공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찾던 곳,

나만의 은밀하고도 가장 익숙한 곳,

보리수나무 그늘.

모든 것이 변하고 떠나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어떤 중심.

다시 방랑길을 가는 모든 낭만주의자들의 아픔과 고적함을 상징하는 나무.(63)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멋지게 해석한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시대는 젊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늙었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을 뿐.

다만 바뀜에 대한 설렘의 잔물결이 인간의 시간을 조금은 더 살 만하게 해 주었다.

다시 악몽은 왔고 다시 희망은 왔고 다시 일상은 그렇게 세대를 지나며 흘러갔다.(143)

 

새로운 시선이다.

시대가 바뀐다고 인간은 행복하지 않다.

악몽도 올 것이고, 희망 역시 거기 섞일 것이다.

삶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잘 적기는 쉽지 않다.

멋진 글들이 많은 책이다.

 

양로원 앞 꽃가게는 민들레란 뜻의 '푸스테블루메'

불면 날아가는 꽃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앞에서

인간의 삶도 이 이름과 비슷하지는 않나~

후~하고 불면 날아가버리는 한 인간의 시간.

정말 그 시간은 없어지는 걸까.

꽃씨들은 가벼움으로 이 세계 속으로 날아들어 어딘가 다시 정착할 땅을 찾는다.

가벼움이라는 생물학적인 존재의 특성이 그들의 번식을 보장한다.

인간이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오만함의 굳건한 성에 갇혀 살아가리.(191)

 

민들레 이름 하나에서 인간에 대한 생각까지 연역된다.

불면 날아갈 듯~ 이건 애지중지하는 경우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생 역시 그렇다.

 

어느 시대의 국가는 괴물이다.

그의 구성원까지 거세를 하고는 '

건강한 국가'라는 슬로건을 거리에 내건다.

건강하고 잘 생기고 돈도 조금은 있어야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그 끔찍한 '국가'(90)

 

경고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그 과거에 무엇이었는지.(85)

 

지구가 빙하기에 휩쓸려 멸망하기 전에,

과연 이 반도에도 이런 경고가 울려 퍼질 수 있을까?

 

독일어로 '향수병'은 하임붸라 하고, 페른붸라는 말이 있는데, '먼 곳을 향한 그리움, 동경'의 뜻이라 한다.

이 땅이 절망적이었던 만큼, 이 땅엔 향수병보다 페른붸가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바로 이곳이 하임붸의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절망의 도가니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이곳을 떠난 시인이 하임붸에 싸여 적는 책이 아니다.

그의 페른붸가 다다른 곳, 작은 뮌스터 마을에서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곳 이야기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때로는 어둡고 애잔하게, 혹은 힘차고 강렬하게 드러나던 여행'과는 조금 다르게 깊이가 있다.

 

공동체에서 떨어져나온 인간은 이 세계에서 그리 복된 삶을 살지 못하지만 어떤 후배는,

"선배, 우리 아무것도 아니에요. 복되지 않은 게 무슨 대수예요, 걸으세요, 계속.

그러다가 바람이 되거나 별이 되면 어떤가요.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출세와 물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름없는 이방인이 최고예요."라고 위로했다.(23)

 

그래. 복된 삶이라는 것이, 출세와 물질이라면, 참 헛되다.

바람이나 별이 되면 어떠랴... 걸을 수 있을 때, 걷는 것도 참 좋다.

 

지금도 광화문에서는 걷는 이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걷는 이들을 막는 형광빛 국가 권력의 시녀들도 가득하다.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서,

참 한줌의 권력을 위해 더럽게 치사한 것들에게 저주 있을지라.

오눌부터 한달간 저주퍼붓기를 실천하겠다.

예전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고 너무 치가 떨려,

관동 대지진보다 더 큰 저주를 일으켜 달라고 빌었던 적이 있다.

석달쯤 뒤에 한신(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가서 싸울 수는 없는 현실이니

내가 사는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소리치며

저주를 퍼붓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