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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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없이 걸었다> 中)

 

이 시집의 홍보 문구에 <너 없이 걸었다>의 한 구절이 들어 있었다.

허수경의 독일 생활은 '혼자'라는 생각, '저물어 간다'는 생각을 곱씹게 한다.

 

모든 세상은 기차역과도 같다.

우리 삶은 공연중이 연극의 중간에 불쑥 내던져진 존재와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한시적이어서,

아주 재미있는 대목에서, 또는 감질맛나는 대목에서, 내지는 세상의 비참함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종착역을 맞는 기차처럼,

불현듯 저녁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국에 혼자 서있는 느낌은 어떨까?

 

어느 기차역, 노숙자는 낡은 시집을 읽으며

기차가 들어오거 나가면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시집 제목을 훔쳐 보았다.

<불가능에게로>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의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뒤표지)

 

삶은 참 허전하고 허탈한 것이기도 하다.

진실이나 진리에는 매몰차게 눈을 흘기고 추악한 악마에게 달콤한 추파를 던진다.

추파는 가을 물살같은 눈길이다.

이제 곧 저물고 말, 겨울이 되면 얼어붙고 말, 아련함에서 오는 악은 더 단말마의 비명으로 추악하다.

 

  익은 속살에 어린 단맛은 꿈을 꾼다 어제 나는 너

의 마음에 다녀왔다 너는 울다가 벽에 기대면서 우더

운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이렇게 사라져갈 여름은 해독할

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다 쓰고도 아린 것들이 익어

가면서 나오는 저 가루는 눈처럼 자두 속에서 내린

다 자두 속에서 단 빙하기가 시작된다 한입 깨물었

을 때 빙하기 한가운데에 꿈꾸는 여름이 잇속으로 들

어왔다 이것은 말 이전에 시작된 여름이었다 여름의

영혼이었다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라는 거울, 혹

은 이름이었다 너를 실핏줄의 메일에게로 보냈다 그

리고 다시 자두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은 상형

문자처럼 컴컴해졌다 울었다, 나는 너의 무덤이

내 가슴속에 돋아나는 걸 보며 어둑해졌다 그 뒤의 울

음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두뿐이었다 (자두, 전문)

 

여러 번 소리내어 읽었다.

낯선 한국어의 음절들이 아름답게 입속에서 부딪쳤다.

까닭없이 참 좋았다.

 

둥근 과일들에 대한 집착은 향기롭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돌이킬 수 없었다, 부분)

 

이런 날들, 안개낀 독일 거리라면 더욱 캄캄하리라.

그런 날들엔 오렌지나 포도나 자두가 더욱 위안이 될는지도...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그들은 둥글고, 향기로우므로...

 

  시간의 가슴에서 또 하나의 시간이 나와 태양을 가

두었다 세상은 캄캄해졌다 비가 왔다 그 비를 맞으며

바위들은 어둑어둑 가슴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운수 좋은 여름, 부분)

 

어느 곳에서나 그곳에 독한 기운이 서린 고뇌가 있게 마련이다.

현실의 유럽은 난민과의 전쟁인 모양이다.

그리고 테러가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녁을 맞는 일은 운수 좋은 날의 일인지도 모른다.

 

신문에 자주 실리는 이름의 여인들이 도망가 있다는 나라, 독일.

대통령도 임기 마치고 일가친척도 없으니 독일로 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친구와, 친구 딸과, 친구 딸의 아이를 보면서 너른 잔디밭에서 웃고 싶었을지 모른다.

삶이 몹시 쓸쓸한 역이었고, 그 어두운 역은 늘 화려해 보이지만 떠나는 것이었으므로...

푸른 기와집에서의 추억을 그대로 안은 '더 블루'한 노년을 꿈꾸었을지도...

역시 삶은 그렇게 그로테스크하다.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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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09: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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