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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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읽고 나서

언제나 머릿속에 남는 건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다.(691, 옮긴이의 말 중)

 

그랬다.

여느 장르 소설은 사건을 뼈대로 소설을 진행한다.

첫부분에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묘사되고,

그 사건의 해결 과정을 위해 인물은 부수적으로 관계를 맺는 형식.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사건은 아주 부차적이다.

그렇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사건과 그 사건의 해결 역시 맛깔나는 재미를 준다.

다만 좀 지루하게 홍보담당관의 업무가 늘어지지만,

승진을 위한 투쟁과 암투 등의 인간사가 다 그렇듯 추한 면모 사이에서

전문가의 냉철함도 함께 한다.

 

주인공 미카미의 딸 아유미는 실종상태다.

가출인데 연락이 안 되고 있고, 경찰의 속성상 범죄에 이용된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세 번의 전화를 아내가 2번, 본인이 한 번 받자 바로 끊어진다.

 

아유미가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그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기 위해서는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이름도 묻지 않고, 경찰에도 구청에도 신고하지 않고

아유미가 마음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줄 '누군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아유미를 놓았다.

살아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자신의 딸이 아니어도 좋다.

'여기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아니었다고요. 그래서 아유미는 나간 거예요.'(674)

 

청소년 자녀와 갈등을 겪는 부모가 읽어도 좋다.

어른의 입장에서 '요즘 아이들'은 참 개념 없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의 입장에서 '꼰대'들도 밥맛이긴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왜 좌지우지 하려느냐는 저항은 이유 있다.

 

펄럭,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면 노트를 넘기는 소리조차 박력을 지니게 된다.(571)

아카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카미보다 10센티는 작은 그의 시선이 아득히 높은 곳에서 미카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135)

 

이런 것은 기자를 한 경험에서 우러난 묘사일 것이다.

시험 감독을 하노라면, 아이들의 샤프가 문제푸는 콩콩소리가 교실에 가득 울릴 때가 있다.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아이들 사이의 콩콩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듯, 기자역시 그럴 것이다.

그리고 키는 작지만 높은 사람. 묘사가 아릿한 맛을 낸다.

 

미카미와 젊은 여경 미쿠모.

좋은 선배와 멋진 후배다.

 

이런 얼굴 필요 없어.

더 살기 싫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남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경찰이 되었는데.(484)

 

꿈속에서 딸아이의 비명과 자신의 비명이 교차된다.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회한과 현실의 고난이 빚어내는 꿈.

 

오늘 아침 꿈은,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나 혼자 남았다.

우연히 한국인 관광객들 틈에서 일본인 남성을 만나

둘이 더듬거리며 대화를 시작하다 꿈이 깼다.

무언가 낯선 환경으로 들어가야 하는 불안감일까.

꿈은 현실을 일정정도 반영한다니까.

 

당신들은 아무것도 몰라.

억지로 발돋움해서 위만 보니까 제 발밑이 무너지는 것도 모른다고.

뭘 모르는 건 자네요.

본부장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나.

곤란해지는 건 우리야. 조직 전체에 불벼락이 떨어진다고.(419)

 

조직이란 그렇다.

개인은 조직을 한 시점에서 비판하지만,

기능론적으로 조직은 유기적인 조합인 것이다.

한 시점에서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전체에서 보면 필요한 조각일 수 있다.

그래서 조직생활은 어렵다.

 

보습학원으로 보이는 건물 창문에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색 더플코트에 체크 머플러, 핑크색 털장갑,

아유미와 똑같은 차림새의 여고생들이 하나둘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227)

 

유니폼은 그야말로 한 가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어준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모습은 비슷한 옷만으로도 그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를 잃고 나면 일상조차 눈물겨울 것이다.

그런 마음이 실감난다.

 

사건 해결도 재미있지만, 그건 뒷부분에 한정적이고,

직장에서의 갈등,

아이를 잃은 부모의 존재, 둘 사이의 갈등과 내적 갈등,

이런 인간의 고뇌가 오롯이 살아있다.

 

진심으로 대하면 기자들은 기어오릅니다.

이해하는 시늉만 하십시오.(39)

담당관님은 알 필요 없습니다. 홍보실은 벽에 걸린 스피커예요.

방송실은 다른 곳에 있고, 그 마이크를 쥐는 건 한정된 사람들 뿐이란 뜻입니다.(297)

 

직장 생활 참 고되다.

이런 것이 태생적으로 안 되는 인간상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승진에 곤란을 겪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또 그런 사람이 진국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사는 볼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요지경'인 모양이다.

 

잠깐의 우연이 평생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그 자리에서 어떤 직책을 맡을 것인가.

갖가지 이유와 내력을 말할 수 있어도 수많은 우연이 작용한 끝에 현재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325)

 

진심으로 순종하는 부하란 존재하지 않으며,

부하의 내면을 파악하고 있는 상사 역시 없다.

그런데 저 혼자 멋대로 신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부하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 쓸지를 생각하며

이 친구는 이렇다 저렇다 분류해 저 편할대로 알기 쉬운 단색의 라벨을 부지런히 붙여왔다.

가정에서도 그랬다. 그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73)

 

아내에게도, 아이에게도 제멋대로 라벨을 붙였음을 생각하는 미카미.

그 깨달음의 과정이 눈물겹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인물들을 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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