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순우 글 그림 / 도솔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이런 책의 효시는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가 아닐까? 감옥살이에서 개미나 쥐와도 의사 소통을 하고픈 심정을 풀꽃으로 전이시킨 감동과 생생한 그림에서 느껴지는 애정의 결과물.

그리고 권오분의 제비꽃 편지에서도 풀꽃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왔고...

이 책에서는 그야말로, 산책의 결과물로서 꽃과 나무, 풀꽃들에 대한 관심이 엮어낸 결과물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림을 들여다 보면, 그 관찰력 뒤에 숨겨진 애정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일찍 출근해서 서울 근교의 구룡산을 오르내리며 만나는 풀꽃들을 그리고 묘사하고 어루만지고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전에 중학교 책에던가, 김동리의 수목송 같은 멋대가리 없는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김동리가 남한에서는 대단한 작가처럼 읊어지지만, 한국 문학의 저류가 반일 계몽 문학에 있다면, 남한의 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받지 못한 서자의 그것일 수밖에 없다. 순수 문학이란 딱지를 붙인 그들의 글은 오로지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는 잘난 체하는 글발이었던 것이다.

중학생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글을 교과서에 실어야 했던 교과서 편수자들의 돌머리 탓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김동리의 수목송에 나오는 한자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이양하의 신록 예찬을 죽자사자 외운 적도 있다. 일제에서 해방시켜준 감사한 식민 모국 어메리카의 은혜를 잔뜩 입은 영문학도들이 잡문으로 여겨지는 <수필>을 끄적인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신록 예찬은 신록이 아름답다는 것은 예찬 일변도로 늘어놓은 따분한 글이다. 사실 영어권에서 <수필 - 에세이>는 한국의 그것처럼 붓가는 대로 쓰는 잡문이 아니다. 사변을 정리한 논리적인 글이지, 비전문가가 쓰는 신변잡기의 잡문이 아닌 것이다.

이 사람, 이순우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꽤 멋진 글을 쓸 줄 안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부분도 있고, 나무에 대한 사랑의 눈은 우주의 진리에 닿아 있기도 하다.

... 털어 버리고 나면, 벗어버리고 나면 이러헥 환하고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지워 버리고 비워 버리고 나면 자신은 물론 다른 것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주기적으로 거추장스러운 짐과 옷을 벗어버리고 평상심으로 되돌아가 좀 더 넓고 밝게 볼 수 있는 지혜를 잎을 지우는 나무숲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스스로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서 마련하게 되는 빈자리를 다른 것들에게 베풀 줄 아는 나무숲의 미덕을 본받아야만 한다. 과감히 잎을 떨구는 나무숲과 같이 쉼과 여유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뭇잎 떨군 겨울 숲을 보면서, 그는 무소유의 역리를 볼 줄 아는 관조의 눈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버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 나무들은 하루하루 그 꽃눈을 길러 나가는 인내의 겨울을 기르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볼 줄 안다.

멋진 눈이다. 멋진 눈을 가진 사람은 멋진 사람이다. 그가 곧 선생이다.

멋진 사람이 쓴 책이 멋진 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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